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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28일
In 금요 묵상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때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호 1:1b). 북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여로보암 1세)이고, 다른 한 명은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여로보암 2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13번째 왕 때 활동했고 그 때가 북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할 때였습니다(왕하 14:23-28).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호세아 10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a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이 말은 이스라엘이 부강한 것을 은유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해주신 분이 누구실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열왕기하 14장 26-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b절입니다.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제단’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제단을 말하고, ‘주상(柱像)’은 기둥 모양의 우상을 말합니다. 우리말성경에는 ‘돌기둥 우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부강해질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2절입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벌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하게 된 이유를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이 반은 하나님께 가 있었고, 반은 우상에게 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도 섬겼고 우상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하셨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출 20:3-6). 어떤 형체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 우상이 될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없을까요?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요일 2:15-16, 약 4:4). ‘두 마음’ 품는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사람도 두 마음 품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시 119:113). 야고보서 4장 8b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3절입니다. “‘우리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지만, 이제 임금이 있은들 무엇에다가 쓰랴?’ 하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새번역).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면 나라를 잃게 될 것이고, 한탄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왕이 죽고 나서 31년 뒤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 10장 1-3절이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수 2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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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21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61장 1a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나’는 누구일까요? 메시야(구세주)입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이 말씀을 찾아 읽으시고(눅 4:16-20)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 4:21b)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 글은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데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눅 4:18)이고,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낮은 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대체로 마음도 가난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1a절 다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b). 이 말씀도 메시야가 하실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무엇에 대한 애통일까요? 죄에 대해 애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눅 18:13). 두 사람 중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간 사람은 세리였습니다(눅 18:14a).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1-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롬 3:10, 23). 죄인은 죄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죄 값은 사망입니다(롬 5:12).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죄 사함 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롬 6:23, 5:19).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사랑입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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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14일
In 금요 묵상
디모데후서 2장 14-26절에는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14a). 그렇게 말한 이유는 말다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14b절). 말다툼을 하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고, 듣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에게 말다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안 들을 가능성이 크고, 잘못하다 보면 목사가 반발을 살 수도 있고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말다툼에 웬만하면 안 끼려고 합니다.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끝내기를 바라면서 기도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라”는 말씀도 합니다(25절). 그러므로 목사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할 때는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다른 성도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성도님이 계시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말다툼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말다툼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15b절). 어떻게 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15a절). 목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은 목사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합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면 엉터리로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엉터리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사람의 말로 가르칩니다. 인본주의 사상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좋은 일꾼이 아닙니다. 둘째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16a절). ‘망령되고 헛된 말’은 비성경적인 말, 이단적인 말입니다(16b-18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쳤습니다(18절).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안 믿고 영혼의 부활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안 믿으면 부활을 안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5:12).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고 가르치면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18b절).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하면 안 됩니다. 논쟁할 필요도 없습니다(19b, 23a절).
셋째는 깨끗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20-21절). 큰 집에는 ‘금 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 ‘질그릇’도 있지만 주인이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도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많이 배웠다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한다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26). 많이 못 배웠어도, 말을 잘 못해도 깨끗하면 쓰십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시 119:11, 9). 둘째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와 함께 따르라고 했습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따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혼자하면 안 되고,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히 1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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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07일
In 금요 묵상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는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남자 성도를 대할 때는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젊은 남자 성도를 대할 때는 친형제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연세가 많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는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젊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는 순결한 마음으로 친자매를 대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또 다른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친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은 친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편하게’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입니다. 가족들 간에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가정도 있지만 그런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 가족들 간에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도 있어야 하고, 성도들 간에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인간관계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좀 친하다고 해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좋은 관계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가 오래 계속되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3:5).
말을 할 때도 예의를 지켜서 해야 합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야’ ‘너’로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OOO 자매(님)/형제(님)/성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 자매님들 간에 ‘OOO 자매(님)’이라는 호칭대신 ‘OO야’, ‘OO 언니’라고 부르는 자매님들이 많아진 것을 봅니다. 그렇게 부르게 되면 ‘야’ ‘너’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품격이 떨어진 말도 쉽게 나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OOO 자매(님)/모매님/성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3절 이하에는 ‘과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과부’라는 말이 나쁜 말은 아니지만 듣기 좋은 말도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부득불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 안에 과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도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3절은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참 과부’는 연세가 많은 혼자되신 분을 말합니다. “참 과부를 존대하라”고 한 이유는 젊은 나이에 혼자된 분들은 재혼할 가능성이 높고, 재혼하면 더 이상 과부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세가 든 과부를 존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 과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75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디모데전서 5장 9절은 60세는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디모데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수명이 오늘날보다 짧았기 때문에 60세가 오늘날의 75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에는 60세가 노인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 60세는 중년이고 75세는 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 과부’로 존대 받으려면 살아온 삶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딤전 5:9-10). 존대 받는다는 말은 도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손자가 있다면 자녀/손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딤전 5:4), 자녀/손자가 없고 친척이 있다면 친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딤전 5:16).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16)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족이나 친척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돕는 우리가 됩시다.
혼자되신 분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딤전 5:5-6). 혼자되신 분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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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31일
In 금요 묵상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역하라”고 했습니다(딤전 1:3a).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게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딤전 1:3b-4a).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런 사람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3절)은 바울이 가르친 교훈과 ‘다른 교훈'을 말합니다. ‘다른 교훈’을 공동번역성경은 ‘그릇된 교리’로 번역했고, NIV 영어성경은 ‘틀린 교리(false doctrines)’로, NASB 영어성경은 ‘이상한 교리(strange doctrines)’로 번역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갈 1:6-7),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은 같은 말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다른 교훈(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이단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이단은 아니지만 성경을 살짝 비틀어서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유튜브에서 여러 명 보았는데, 성경을 잘 모르면 그들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튜브를 볼 때도 분별력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이유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딤전 1:4b). ‘하나님의 경륜’은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일’(NIV), ‘하나님의 계획’(공동번역)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다른 교훈’을 말하는 자들이 있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자들이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바른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교회는 늘 시끄러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6b-7)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잘못된 사람들이 붙든 것은 ‘율법’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 계속 말하는데(딤전 1:8-11) 그것을 봐도 그들이 붙든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롬 3:20).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갈 2:16, 3:24-25). 그런데 에베소의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른 교훈(교리)’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교훈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목사님, 유명한 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검토)”해야 합니다(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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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24일
In 금요 묵상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대상인 ‘너’는 시온, 즉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사야 60장 1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래 전부터 여러 민족에게 짓밟혔고 지금도 분쟁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방인의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예루살렘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1a절)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1b절). ‘네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메시야를 말합니다. 이사야 9장이 2절에서 말하는 빛도 메시야를 말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이사야 60장 1절 다음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2-3). 이스라엘 사람들 “위에 임하”신 여호와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알아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날 때 이방 나라들은 빛 되신 예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우러러볼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60장 2-3절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60장 1-3절은 천년왕국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이사야 60장 전체가 천년왕국 때 있을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7년 대환난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면 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모입니다(4절). 모일 때는 빈손으로 모이지 않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모입니다(5절). 수많은 낙타와 양들도 오게 되는데, 양들 중 일부는 성전에서 드려질 제물로 사용됩니다(7절). 천년왕국 때 있을 성전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40장 이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년왕국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속죄의 일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천년왕국 때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이방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이는데, 이방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도 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을 드리기 위함입니다(9절).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것은 이사야 2장 2-3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1절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이 비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5:14a, 16). 그렇게 사는 우리가 됩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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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18일
In 금요 묵상
미국에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불쌍하게 생긴 유대인 남자의 얼굴모습 부조(浮彫)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습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애 1:12b).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의인화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한 말입니다. 자비와 긍휼을 구했지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은 고사하고 유다가 멸망한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애 1:21a). 특히 에돔이 그랬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시 137:7). 참으로 고약한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관계가 안 좋았다 해도 고통당하면 불쌍히 여겨주고 도와주는 것이 도리인데 에돔과 유다의 주변 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애 1:14). ‘예루살렘이 감당할 수 없는 자’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죄악’을 범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렘 25:2-9). 유다가 멸망한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벧후 3:9).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멸망하지 않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멸망하는 것입니다(요 16:9).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가 70년 뒤에 다시 회복됩니다. 그랬다가 몇 백 년 뒤에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합니다. 로마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계로 흩어져서 2천 년 가까이 고통을 당했는데, 그들의 고통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까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 1:12a)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 때문에 고통당했다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사 53:5).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창 12:3).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과 전쟁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창 2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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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11일
In 금요 묵상
‘위대한 삶’은 어떤 삶일까요?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삶입니다. 침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 같은 분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불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젊은 나이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위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정하셨고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요시야 왕도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1a절). 39살에 애굽과 전쟁을 하다가 전사했습니다(대하 35:23-24). 짧게 살았지만 그의 삶은 위대했습니다(2절, 왕하 23:25). 그의 아버지 아몬은 악한 왕이었고(왕하 21:20-23), 할아버지 므낫세도 악한 왕이었습니다(왕하 21:5-6). 그런데 요시야가 좋은 왕이 되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누군가가 어린 요시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주었기 때문입니다(잠 22:6). 누가 그렇게 해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하 34장을 보면 요시야는 왕위에 있은 지 8년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다고 했습니다(3a절).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16살 어린 나이에 그렇게 했습니다. 왕위에 있은 지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상을 제거했습니다(3b절). 20살도 사실은 어린 나이인데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했으니 요시야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26살이 되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성전을 수리했습니다(3-6절). 성전을 수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성전에 드려진 돈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맡기고 돈 계산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7절). 요시야 왕이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시야 왕은 통이 크고, 사람들을 잘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왕이 자신들을 믿어주니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시야의 이런 면은 우리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요시야처럼 사람을 믿어줄 줄 알아야 하고 격려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8절). 서기관 사반이 율법책을 요시야 왕에게 읽어주자 왕이 옷을 찢었습니다(10-11절). 범죄한 자기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재앙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13b절).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들을 보냈습니다(13a절). 훌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재앙을 내릴 것이지만(16-17절), 요시야 왕 때는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20절).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3명과 손자 1명이 차례로 통치하다가 유다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위대한 삶을 산 왕으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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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04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59장에는 유다 백성의 죄와 구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와 구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절의 유다 사람들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3절). 나라 전체가 죄로 물들었습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다”(4a절)고 했습니다. 판사들과 사법부는 그 나라의 정의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판사들과 사법부가 부패했으니 그 나라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판사들과 사법부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유다 사람들은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한다”고 했습니다(4b절). 공동번역성경에는 “터무니없는 것을 믿고 사실무근한 소리를 지껄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짜 뉴스와 가짜 정보들이 생각납니다. 유튜브에는 좋은 정보와 바른 소식도 많이 올라오지만 거짓 정보와 가짜 뉴스는 또 얼마나 많이 올라옵니까. 4b절 말씀처럼 사실무근한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도 많고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로 물든 사회의 모습입니다.
유다 사람들의 죄 중에는 ‘악한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7a절).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만 죄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악한 생각도 죄로 보십니다. 노아 시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악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창 6:5). 악한 생각도 죄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12).
죄를 지은 유다 사람들은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7b-8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평강이 그들에게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평안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사 57:21, 48:22).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사람 스스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참 평안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4:27a).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의 죄를 지적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이 자신들과 멀다는 말도 했습니다(11절). 구원이 멀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12a절).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켰다”고 했습니다(13a절). 유다 백성이 죄를 짓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뿐 아니라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이 이 이유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롬 1:28). 죄에서 떠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4:6).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할 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을 구원해줄 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직접 구원해주시기로 합니다(15b-16a절). 16절에 ‘중재자’, 20절에 ‘구속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700년 뒤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다의 구원을 말하면서 동시에 구원자 예수님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이스라엘)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마 1:21, 롬 1: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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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19일
In 금요 묵상
열왕기하 9장 27-37절에는 유다 왕 아하시야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예후에 의해 죽임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악한 아합 왕과 그의 집안을 멸하기 위해 세운 사람입니다(왕하 9:1-3, 6-10).
아합은 19명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제일 악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이 그렇게 된 데는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이 컸습니다(왕상 16:30-33). 아합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6대 왕 오므리입니다. 오므리는 왕위에 12년 있었습니다(왕상 16:23). 아합은 왕위에 22년 있었습니다(왕상 16:29). 아합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였는데 그는 2년 왕위에 있었습니다(왕상 22:51). 짧게 왕위에 있은 이유는 병에 걸려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왕하 1:2a). 그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합의 또 다른 아들 여호람입니다(왕하 1:17). 여호람은 왕위에 12년 있었습니다(왕하 3:1).
예후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움 받고 나서 제일 먼저 죽인 사람이 여호람 왕입니다(왕하 9:22-24). 여호람의 또 다른 이름은 요람입니다.
요람을 죽이고 난 뒤에 예후는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였습니다(27절). 아하시야는 유다의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왕 집안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열왕기하 8장 26절에 의하면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이고, 아달랴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입니다. ‘오므리의 손녀’라면 아합의 딸 아니면 조카라는 말인데, 열왕기하 8장 16-18절을 보면 아달랴는 아합의 딸입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가 아달랴이고, 아달랴의 아버지가 아합이면, 아합은 아하시야 왕의 외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니 아하시야는 유다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왕 집안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요람 왕과 가까이 지내다가 예후에 의해 요람과 같은 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역대하 22:7a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입었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하시야가 죽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했기 때문입니다(왕하 8:27).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 다음으로 예후가 죽인 사람은 이세벨입니다(30-33절). 예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세벨은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펑안하냐?”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이 말한 ‘주인’은 이세벨의 아들 요람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리’는 이스라엘의 엘라 왕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다섯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왕상 16:9-10). 시므리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된 것에 빗대어 예후를 시므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결국 창밖으로 던져져 죽었고, 이세벨의 시신은 개들이 와서 먹었습니다(34-37절). 엘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왕상 21:23). 이세벨의 끝이 이렇게 된 이유는 이세벨이 행한 악행 때문입니다(왕상 21:25). 아합 왕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한 사람도 이세벨이었고, 죄 없는 나봇을 죽게 한 사람도 이세벨이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사람도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런 이세벨을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예후가 아하시야 왕과 이세벨을 죽인 내용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다 하는 것과,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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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12일
In 금요 묵상
열왕기하 6장 15-23절에는 아람(시리아)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읍을 에워싼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려고 한 이유는 아람 군대의 동향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는 엘리사 선지자를 잡아야 아람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5-23절 말씀을 읽어보면 엘리사 선지자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영의 눈을 뜨고 산 사람입니다. 도단 성읍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 선지자의 종은 두려워했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사 선지자는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5-17절). 아람 군대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지만 하나님의 군대를 보는 것은 영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영의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살아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시 121:1-2). 영의 눈을 뜨고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시 19:8), 기도하는 것입니다”(시 119:18).
둘째, 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열왕기하 6장 15-23절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세 번 기도했습니다(17a, 18a, 20a절). 세 번의 기도가 다 '눈'과 관련된 기도입니다. 세 번의 기도를 하나님은 다 응답해주셨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의 생활이었고 삶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복이요 특권입니다(요 16:23b-24, 마 7:7-8). 기도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약 5:16b).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셋째,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기 위해 접근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18절). 그들의 눈이 멀자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 성읍에는 당신들이 찾는 그 사람이 없소. 내가 당신들을 그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인도하겠소”라고 하고는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했습니다(19절).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성 안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거짓말로 아람 군대를 속였지만 그것은 엘리사 선지자 자신도 살고, 아람 군인들도 살리기 위한 그의 지혜였습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엘리사 선지자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넷째, 그는 관용과 자비의 사람입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왕은 아람 군대를 쳐서 진멸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물었더니 “치지 말고 음식을 먹여서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21-22절).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그들을 배 불리 먹여서 돌려보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부터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23절). 이런 것이 관용과 자비의 위력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람 군인들을 죽였다면 아람 왕이 바로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사 선지자의 관용과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딛 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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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05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선지자 시절의 유다 사람들은 금식도 하고 안식일도 지켰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면이 강했습니다(사 1:11-13).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은 이렇게 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합니다. 당시 유다 사람들의 금식은 네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습니다(3a절).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는데 그것도 잘못되었습니다. 금식을 하는 두 가지 목적은 죄를 용서받기 위함과 기도응답을 받기 위함입니다. 속죄일의 규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레 16:29-31) 스스로 괴롭게 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한 것이 금식입니다. 속죄일은 1년에 한 번 있는 날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날입니다. 왕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살리기 죽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기 전에 금식기도를 부탁했습니다(에 4:15-16). 이와 같이 금식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와 기도응답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들은 금식하는 날 오락을 했습니다(3b절). ‘오락을 구했다’고 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자기의 즐거움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금식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그들은 금식하는 날 일꾼들에게 많은 일을 하게 했습니다(3c절). 속죄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하면 안 되고 종들도 하면 안 됩니다(레 16:29).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속죄일에 자기들은 금식을 하고 일꾼들에게는 일을 시켰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은 금식하면서 다투고 싸웠습니다(4a절). 주먹으로 치고받으면서 싸웠는데, 금식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금식할 일이 있으면 우리도 유다 사람들처럼 잘못된 금식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 몇 번 했다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금식을 할 때는 표 안 나게 해야 합니다(마 6:16-18).
9b-11절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금식하고, 바르게 살아가면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일까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9b절).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새번역성경은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국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면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주린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10a절). 셋째는 괴로운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10b절). ‘괴로운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한다’는 말은 괴로운 자의 심정을 헤아려준다는 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기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고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13-14절에서는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일주일 내내 일만하면 몸도 망가지고 하나님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에는 몸과 마음이 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일예배를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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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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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8월 29일
In 금요 묵상
시편 106편 12-29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의 찬양을 불렀습니다(12절). 그런데 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어버렸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3-14절).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했는데, 그들이 낸 욕심은 어떤 것일까요? 먹는 욕심입니다. 민수기 11장 4-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고기 안 준다고 불평했고, 생선 안 준다고, 채소 안 준다고 불평했습니다. 불평의 원인은 ‘탐욕’이었습니다(민 11:4).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5절).
영혼이 쇠약해지면 죄에 약한 사람이 됩니다. 몸이 허약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져서 병에 잘 걸리는 것처럼 영혼이 쇠약해지면 영적인 면역력이 떨어져서 죄를 잘 짓게 됩니다. 영혼이 쇠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16-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질투’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16절).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경배하는 죄를 지었습니다(19-20절). 그 죄를 지음으로 그들은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21-22절).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24-25절). 그 죄로 인하여 그들은 ‘기쁨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26-27절). 그들은 이방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방 사람들의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지었습니다(28-29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죄를 지은 이유는 그들의 ‘영혼이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15절). 영혼이 쇠약해진 이유는 ‘욕심’을 내었기 때문입니다(14절). 야고보서 1장 15절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들이 짓는 대부분의 죄는 욕심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는 말은 탐심이 있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눅 16:13). 디모데전서 6장 6절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지 못한 상태에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이 잘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만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강건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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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8월 15일
In 금요 묵상
예레미야 50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계의 망치가 어찌 그리 꺾여 부서졌는고 바벨론이 어찌 그리 나라들 가운데에 황무지가 되었는고.” 바벨론은 온 세계를 쳐서 부서뜨리는 망치였는데 바벨론도 결국은 부서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멸망하기 수십 년 전에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했고, 그 예언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과 51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메대와 바사(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해가 기원전 586년이니까 유다를 멸망시키고 나서 47년 뒤에 바벨론도 멸망한 것입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킬 나라에 대해서 예레미야 51장 11b절은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부추기사 바벨론을 멸하기로 뜻하시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것 곧 그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서 50장 9a절은 “보라 내가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대항하게 하리니 그들이 대열을 벌이고 쳐서 정복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사(페르시아)는 바벨론의 동쪽에 있었지만 북쪽에 있는 메대와 연합해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북쪽’에서 온다고 한 것입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이유에 대해 예레미야 50장 24b절은 “네가 여호와와 싸웠으므로 발각되어 잡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와 싸웠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50장 29b-32절은 바벨론이 교만했기 때문에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바벨론은 세 차례에 걸쳐 유다를 쳐들어왔는데, 첫 번째는 여호야김 왕 때(605BC), 두 번째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 왕 때 쳐들어왔습니다(597BC). 두 번째 쳐들어왔을 때 바벨론은 성전의 많은 보물을 약탈해갔습니다(왕하 24:10-13). 세 번째 쳐들어왔을 때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켰는데, 그때는 성전의 모든 기물을 가져갔고 성전을 불살랐습니다(왕하 25:8-9, 13-17).
바벨론이 유다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성전을 모독하고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의 보복’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렘 50:28). ‘성전의 보복’은 성전을 위한 보복이라는 말입니다(렘 51:11b).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사탄을 벌하신 이유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사 14:12-15).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도 그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사람의 교만 중에서 가장 큰 교만이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벌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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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8월 08일
In 금요 묵상
예레미야 48장은 전체가 모압의 멸망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을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26, 29, 42절). 예레미야 선지자보다 100년 앞서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도 모압의 교만을 지적했는데(사 16:6a), 이런 것을 보면 모압의 교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의 교만은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27절), 그들이 교만한 이유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입니다(32절). 예나 지금이나 물질이 많으면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잠 30:8b-9). 부자들이 예수님을 잘 안 믿는 이유도 물질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마 19:23-24). 모압 사람들은 교만했을 뿐 아니라 그모스라는 우상도 섬겼습니다(7, 13, 46절). 그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탈취하는 자’를 통하여 그들의 재산을 거두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2절). 모압이 멸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교만과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멸망하기 전에는 성읍에서 살았지만 멸망하면 바위 사이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8절). 성읍들이 점령당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산악지대에 숨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40-42절). 그렇게 해서 모압의 풍요와 교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30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모압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두고 울부짖을 것이다. 모압의 모든 사람들을 두고 소리칠 것이다. 내가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애곡할 것이다”(31절, 우리말). 길헤레스는 모압의 중요한 도시입니다. 예레미야가 모압을 위해 울겠다고 한 이유는 모압 사람들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사 15:5-9a, 16:11).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모압에 대해 가졌던 마음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우리 이웃 사람들이 죽으면 죽는 즉시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모압이 멸망하게 된 이유는 교만과 우상숭배 때문이었고, 오늘날 사람들이 멸망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을 안 받아들이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사실은 다른 무엇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믿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신론’이라는 신앙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고, 어떤 사람은 돈을 믿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믿는 신은 재물의 신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돈을 위해 살고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새번역). 하나님을 모르고 멸망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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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8월 01일
In 금요 묵상
예레미야 43장에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원함이 다를 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지 않고 나의 원함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이고 그들의 지도자는 요하난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 유다 사람 그다랴를 유다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왕하 25:22). 그런데 이스마엘이라는 또 다른 유다 사람이 그다랴를 죽입니다(왕하 25:25). 그다랴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유다 사람들과 바벨론 군인들까지 죽입니다(렘 41:3). 그 일로 인하여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갑니다(왕하 25:26).
요하난과 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가다가, 하나님께 한번 물어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달라고 부탁합니다(렘 42:2-3). 물어봐달라고 하면서 그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 42:5-6).
10일 뒤에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왔고 그 응답은 “애굽으로 가지 말고 유다 땅에 있으라”는 것입니다(렘 42:10-11). “애굽으로 가면 잘못될 것이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렘 42:14, 16-17).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하난과 유다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너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렘 43:2-3).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달라고 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요하난과 유다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뜻이 너무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자기들의 계획을 미리 세워놓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우리도 계획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내 뜻을 먼저 세우면 유다 사람들처럼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원함이 다를 때는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애굽으로 간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바벨론 왕이 애굽을 쳐들어와서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렘 43:11). 유다 사람들은 애굽으로 가면 안전할 줄 알았지만 애굽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안전한 곳은 유다 땅이었습니다. 유다 땅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렘 42:10-11). 오늘날 우리에게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한 곳입니다. 우리 생각에 안전한 곳,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한 곳에 있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원함이 다를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됩시다(잠 14:1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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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7월 25일
In 금요 묵상
예레미야 38장 1-13절에는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냐 전하지 않을 것이냐의 기로에 선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아 전한 말씀은 갈대아 사람들에게 항복하면 살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2-3절). 이 말씀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그는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야 했습니다(6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말을 들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의 기로에 선 사람들입니다(1-2절). 그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었을 뿐 아니라 왕을 찾아가서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4절). 그렇게 한 이유는 예레미야가 전한 말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예레미야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그들의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더 중요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그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잠 19:20).
세 번째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기로에 선 사람입니다. 그 기로에서 그는 고관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죽이는 선택을 합니다(5절). 그는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21살 때 왕이 되어 11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왕하 24:18a). 그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아들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봐야 했고 두 눈이 뽑혔고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왕하 25:7).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듣고 바벨론에게 저항했기 때문입니다(대하 36:12-13). 그는 이 사람이 이 말하면 이 말 듣고, 저 사람이 저 말하면 저 말 듣는 사람이었습니다(5, 9-10절).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시 119:105, 113).
마지막 네 번째로, 왕궁 내시 에벳멜렉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살려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기로에 선 사람입니다(7a절). 그는 예레미야를 살리는 선택을 합니다(8-9절). 예레미야는 에벳멜렉 때문에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10-13절). 에벳멜렉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레미야를 살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참 선지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에벳멜렉에게 복을 주셨습니다(렘 39:15-18). 우리도 에벳멜렉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복주십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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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7월 12일
In 금요 묵상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을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I will make a new covenant)”라고 했으니까 새 언약은 미래에 맺을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과거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출 19:1-6, 레 26장)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32절).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은 깨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 12:2-3)은 유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 맺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33절). 이 언약은 최종적으로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집니다. 34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의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b) 하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것입니다(슥 12:10-13:1).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공중으로 먼저 오시고 7년 뒤에 지상으로 내려오시는데,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오실 때까지는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기간입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롬 11:25-27).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지지 않을 것은 예레미야 31장 35-37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해진 질서가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언제까지나 한 민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 31:36, 새번역).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되었다고 하는 대체신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고 교회는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끝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구원받은 이방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고후 3:6a, 새번역).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재림하신 뒤에 새 언약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4천 명이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복음을 전할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되면 복음전도와 관련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롬 11:11-12).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는 말씀도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상 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들로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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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7월 05일
In 금요 묵상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베드로후서 2장 1a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예레미야 28장에는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이고 유다 사라들은 바벨론 왕을 70년 동안 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렘 25:11). 그런데 하냐나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하나냐가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목에 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러뜨리기도 했습니다(10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목에 걸고 다니라고 한 멍에입니다. 멍에를 목에 걸고 다니라고 한 이유는, 유다가 바벨론 왕 섬기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렘 27:6-7a). 그런데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빼앗아 부러뜨렸습니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11절). 이것도 그가 지어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15-16절).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하나냐는 죽고 말았습니다(17절).
하나냐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전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을 안 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합니다. 죄나 심판이나 지옥에 대해서는 설교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도 설교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설교는 교양적인 설교, 덕담 같은 설교입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예수님 믿으면 병 낫는다, 부자 된다’는 유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9절). 하나냐가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평화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심판과 멸망을 말할 때 하나냐는 평화를 말했으니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안 좋아하고 하나냐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된 주의 종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을 합니다(갈 1:10). 사람들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해도 바른 교훈을 전합니다(딤후 4:3-4). 하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딤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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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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