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게시판 게시물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8월 28일
In 금요 묵상
시편 132편에는 ‘다윗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1, 10절). 다윗의 이름은 네 번 나옵니다(1, 10, 11, 17절). 시편 132편을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편 132편에 솔로몬의 글과 비슷한 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8절 vs 대하 6:41a; 10절 vs 대하 6:42).  2-5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잠을 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법궤 둘 곳을 마련할 때까지 잠을 자지 않겠다는 말인데, 그만큼 열심히 법궤 둘 곳을 찾아 마련하겠다는 말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법궤를 말하고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다’는 말은 ‘그 말을 에브라다에서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무 밭에서 찾았다’는 말은 ‘야일의 밭에서 찾았다’는 말입니다. 법궤는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삼상 7:1-2).   7절은 다윗이 법궤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한 말입니다. “그분 계신 곳으로 가자. 그 발 아래에 엎드려 경배하자”(7절, 새번역). 8절은 법궤를 옮기면서 한 말입니다. “주님, 일어나셔서 주님께서 쉬실 그 곳으로 드십시오. 주님의 권능 깃들인 법궤와 함께 그 곳으로 드십시오”(8절, 새번역). 9절도 법궤를 옮기면서 한 말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9절 말씀을 ‘제사장들’과 ‘성도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로 되어 있지만 다른 성경들은 하나님께 한 말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제사장들이 의로운 일을 하게 해주시고, 주님의 성도들도 기쁨의 함성을 높이게 해주십시오”(9절, 새번역).   건너뛰어서 13-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온’ 즉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인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인 이유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세워질 장소가 결정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역대상 21장 18, 26절, 22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땅의 예루살렘이 영원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1-2).   1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먹을 것을 풍족하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최종적으로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제사장들로 의로운 일을 하게 하고, 성도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게 하겠다”(새번역)고 했는데 이 말씀도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이 말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뿔’)가 나오게 할 것이고, 메시야를 위하여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 그의 통치가 계속되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도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편 132편은 다윗이 법궤를 찾아서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윗의 후손 메시야가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18절) 세상을 통치하실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다윗이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이유는 다윗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됩시다. 다시 오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0
0
13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8월 21일
In 금요 묵상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직전에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세상의 왕들을 모아 벌이는 전쟁입니다. 왕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마겟돈이기 때문에(계 16:16)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합니다. 왕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지만 결국 예수님에 의해 죽임당하고 맙니다(계 19:15-21).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스가랴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1-2절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슥 14:1-2).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아마겟돈에 모인 왕들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통치할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입니다(사 24:23). 그들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을 침략한 자들을 치십니다. 그 말씀이 스가랴 14장 3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슥 14:3). 그리고 그때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십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a).   지상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말씀의 검으로 대적하는 자들을 치십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계 19:15a). ‘예리한 검’은 말씀의 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들을 멸하십니다. 그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데(계 19:17-18, 21), 그들이 죽는 것에 대해서 스가랴 14장 12-1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12-13절).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산태로 몸이 썩습니다.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고, 혀가 입속에서 썩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싸우면서 서로 죽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는 방법입니다.   스가랴 14장 14-15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유다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고, 유다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의 금과 은과 의복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것입니다. 그들이 전쟁을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한 사람들의 가축도 재앙으로 다 죽게 됩니다. 이것이 스가랴서가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스가랴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 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날도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시대를 잘 분간해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우리가 됩시다.
0
0
9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8월 07일
In 금요 묵상
요엘서 3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신 후에 모든 민족을 모아놓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모아놓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하시고 판결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마 25:31-33), 그 말씀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의 골짜기’를 요엘서 3장 12절은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말해줍니다.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욜 3:12). 여호사밧 골짜기가 어디일까요? 여호사밧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상징적인 장소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은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모든 민족을 판결하시고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실재적인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 장소가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으로 재림하시면 ‘감람산은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깁니다(슥 14:4-5a). 그 골짜기가 ‘여호사밧 골짜기’이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요엘서 3장 9-11절은 ‘모든 민족’에게 와서 ‘전쟁’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와서 전쟁을 하라고 한 이유는 그들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11절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방의 모든 민족아, 너희는 모두 서둘러 오너라. 이 평원으로 모여라. ‘주님, 주님의 군대를 보내셔서, 그들을 치십시오!’” 모든 민족이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벌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쳐서 ‘심판’하십니다(욜 3:12). 요엘서 3장 9-12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7년 대환난 마지막 부분에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지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세상의 왕들을 모아 일으키는 전쟁입니다(계 16:14, 16). 아마겟돈에 모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슥 14:2).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도와주시고, 예수님은 지상으로 재림하십니다(슥 14:3-4a). 그때 예루살렘을 공격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계 19:15-16), 새들이 와서 그들의 시체를 먹습니다(계 19:7-2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만(욜 3:14-16a), 이스라엘은 보호해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16b-17). 예루살렘은 마침내 ‘거룩’한 도시가 되고 이름 뜻 그대로 ‘평화의 도시’가 됩니다. 이때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되는데, 천년왕국의 수도가 예루살렘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유다의 모든 땅이 비옥해집니다. 땅이 비옥해지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욜 3:18).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큰 강이 됩니다(겔 47:1-12, 슥 14:8).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큰 강이 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이해하는데,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천년왕국에 있을 성전도 실재적인 성전이고(겔 40-47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실재적인 물입니다.   요엘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 이야기로 시작해서(1장) 천년왕국의 소망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3장). 우리에게도 암울한 날이 있지만 천년왕국과 영원한 천국의 소망 있기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0
0
14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7월 31일
In 금요 묵상
요엘서 2장 18-32절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년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흡족하게 주시고(18-19a절), 나라들 가운데서 ‘다시는’ 욕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니다(19b절). 20절에서는 ‘북쪽 군대’를 이스라엘에서 ‘멀리 떠나게’ 할 것이라 했는데, 이 일은 7년 대환난 기간에 있을 일입니다. 7년 대환난이 시작되면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기 때문에(단 9:27a) 이스라엘 백성은 한동안 ‘평안히 거주’하게 됩니다(겔 38:14). 그때 ‘북쪽 끝에서' 많은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데(겔 38:15-16),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이스라엘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해주십니다(20절). 멀리 떠나게 해주신다는 말은 그들을 죽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이 죽기 때문에 그들의 시신을 매장하는데 7개월이 걸립니다(겔 39:11-13). 그들의 무기를 불태우는 데는 7년이 걸리는데(겔 39:9), 7년은 7년 대환난 기간에 해당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북쪽 군대’는 7년 대환난이 시작되자마자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땅과 짐승들도 회복됩니다(21-22절). 이스라엘은 영적인 면에서도 회복되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회복됩니다(23-24절). 이스라엘에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 농사가 잘되는데(신 11:13-15) 천년왕국 때는 그렇게 됩니다. ‘이른 비’는 9~10월에,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에서 ‘풍족히’ 먹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5-26a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26b-27절).   28-29절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설교하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행 2:16-21). 요엘서에서 제일 유명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잘 안 믿지만 7년 대환난 때는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쓰임 받을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계 7장). 7년 대환난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는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슥 12:10-13:1). 그때 요엘서 2장 28-29절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28절의 ‘그 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후를 말합니다.   30-31절은 7년 대환난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마 24:29-30). 일이 일어나는 순서는 28-29절보다 30-31절에 기록된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예언서에서는 흔히 순서가 뒤바뀌어 기록되기도 합니다. 32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로마서 11장 25-27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요엘서 2장 18-32절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서기 70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 2천 년이 지나 지금 회복되어 이 땅에 있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회복은 천년왕국에서 있을 것인데 그 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전에 두 가지 일이 먼저 있을 것인데,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7년 대환난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홍수와 전염병 등은 7년 대환난의 전조 현상입니다(마 24:6-8). 7년 대환난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봐도 7년 대환난의 때가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복음전도에 힘쓰며 살아갑시다.
0
0
10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7월 25일
In 금요 묵상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떼의 재앙을 보면서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욜 1:15)라고 했습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을 보면서 ‘여호와의 날’을 본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 대해 스바냐 1장 14-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날이기에 대단히 무서운 날입니다. ‘7년 대환난’도 대단히 무서운 날입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예수님께서 7년 대환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7년 대환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과 7년 대환난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요엘서 2장에서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했습니다(2a절).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날이라고도 했습니다(10b절). 7년 대환난 기간 중에도 그런 날이 있을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6:12-13, 8:12, 마 24:29).   여호와의 날에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른다고 했는데(2b절), 그 백성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4-11절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 백성은 요한계시록 9장 7-11절이 말하는 ‘황충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백성의 모양이 ‘말’ 같다고 했는데(4절), 황충들의 모양도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다고 했습니다(계 9:7a). 5-6절은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9장에 기록된 황충들에 대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계 9:9-10). 두 말씀이 비슷한 한 것을 보면 요엘서 2장의 ‘백성’은 요한계시록 9장의 ‘황충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충들’을 다른 모든 성경은 ‘메뚜기들’로 번역했는데, 황충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메뚜기들이 아닙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것을 보면 그들은 사탄이 부리는 부대입니다(계 9:1-3). 이들이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계 9:4-6).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을 바라보면서 요엘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12-14절). 여호와의 날은 아직도 미래의 일이기에 요엘 선지자의 촉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벧후 3:8-9).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7년 대환난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마 24:7-8).
0
0
9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7월 17일
In 금요 묵상
요엘서는 전체가 세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예언서입니다. ‘요엘서’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설교를 하면서 요엘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행 2:16-21). 사도 베드로가 첫 설교에서 처음으로 인용한 말씀이 요엘서에 있는 말씀인 것을 생각하면 요엘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엘서를 기록한 사람은 ‘브두엘의 아들 요엘’입니다(욜 1:1). 요엘이 언제 어디서 사역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요엘이 유다의 요아스 왕 때 사역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요아스는 7살에 왕이 되었는데, 요아스가 어린 왕이었을 때 요엘서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요엘서에 왕에 대한 언급이 없고 제사장들에 대한 언급만 있기 때문입니다.   요엘서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이 말씀은 과거 어느 시점에 메뚜기 떼가 모든 것을 먹어버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떼가 ‘다른 한 민족’이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처럼 앗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6절). 메뚜기 떼가 모든 것을 먹어버렸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습니다(10절). 그래서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5절). 8절은 “백성아, 울어라! 약혼자를 잃고 슬퍼하는 처녀처럼, 굵은 베 옷을 걸치고 울어라”(새번역)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으니 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즐거움’도 마르고 말았습니다(12절).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9절).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고, ‘전제’는 포도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제단에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슬피 울라”고 말씀합니다(13절). 몇 년 전에 코로나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메뚜기 떼로 인하여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상황이 되니까 제일 가슴 아픈 일은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큰 비극과 슬픔을 당한 유다 사람들에게 요엘 선지자는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14절).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코로나 때도 다른 곳은 몰라도 교회는 모이게 해주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도록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그 반대로 했습니다. 다른 곳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교회에 대해서만 유독 더 못 모이게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을 보면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15절). ‘여호와의 날’은 세상 끝 날에 있을 심판의 날입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을 보면서 ‘세상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본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기근과 홍수와 지진과 전염병을 보면서 우리는 장차 있을 ‘대환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마 24:6-8, 21).   메뚜기 떼의 재앙과 함께 극심한 기근도 있었습니다(16-20절).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 28:38-42). 나라가 잘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신 28:1-6). 우리나라가 복을 받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0
0
15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19일
In 금요 묵상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 요압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3절).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다윗의 동기가 교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구조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한 말씀도 있습니다(민 1:1-3, 26:1-2). 인구조사는 필요하면 할 수 있지만 그 동기가 교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충동한 자는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1절). 같은 내용을 기록한 사무엘하 24장은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사무엘하 24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하셨다고 했고, 역대상 21장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 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둘 다 맞습니다. 다윗을 격동한 것은 사탄이고, 그것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다윗을 격동하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벌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벌하시려고 허락하신 것입니다(삼하 24:1). 이스라엘이 어떤 벌 받을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락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탄이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을 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욥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를 사탄에게 보여주어 사탄의 말이 거짓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마 10:29).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한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7-8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을 보고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은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사무엘하는 다윗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했고, 역대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을 보고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두 말씀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는데, 역대상은 그 사실을 기록했고, 사무엘하는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이런 것입니다. 다윗은 잘못에 대해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잘못을 하면 다윗처럼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0
0
10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12일
In 금요 묵상
기럇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이야기는 사무엘하 6장(12-15절)과 역대상 15장(1-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실어 옮기는 과정에서 웃사라는 사람이 죽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대상 13:7-10).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에 실어 옮긴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일은 멈추게 되고 하나님의 궤는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게 됩니다(대상 13:12-13).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집에 복을 주셨고(대상 13:14),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궤를 옮기기 위해 다윗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대상 15:3-4). 다윗이 모은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들의 수를 합하면 862명이 됩니다(대상 15:5-10). 그 전에 수레로 옮길 때는 3만 명을 모았습니다(삼하 6:1-2a). 많은 사람을 모아서 옮겼지만 실패로 끝난 이유는 잘못된 방법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어 제대로 옮겼습니다(대상 15:15). 오늘날에도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이 중요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교회가 얼마나 큰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도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시지만 수많은 사람이 모여도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전에 다윗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대상 15:11-12, 14). 그 전에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삼하 6:2b-3).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낸 것을 보고(삼상 6:7) 따라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새 수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새 방법이나 새 도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상한 심령’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시 51:17, 삼상 15:22-23a).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대상 15:16). 그 전에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도 찬양을 했지만(대상 13:7-8)) 궤를 옮기는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그 날의 찬양은 의미 없는 찬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찬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찬양이 좋은 교회가 많지만 하나님 말씀과 동떨어진 교회라면 그 교회의 찬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도 드렸습니다(대상 15:25-26). 그 전에 옮길 때는 제사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제사도 드렸습니다. 제사에는 물질적인 희생이 따릅니다. 오늘날에도 참된 예배에는 물질적인 희생이 따릅니다. 예배시간에 드리는 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모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6:14).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예배자였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순수한 예배자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우리가 됩시다.
0
0
9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서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성경’(또는 ‘축소판 성경’)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로 불리는 이유는 이사야서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많기 때문이고, ‘작은 성경’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사야서의 구조와 내용이 성경 전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66권이고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39권, 27권입니다. 이사야서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앞부분은 39장(1-39장), 뒷부분은 27장(40-66장)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율법’, 신약성경의 내용은 ‘은혜’인데, 이사야서의 앞부분 내용은 ‘심판’, 뒷부분 내용은 ‘회복’입니다. ‘율법과 은혜’ vs. ‘심판과 회복’. 대조되는 내용도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도 ‘예수님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서가 ‘작은 성경’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내용인 이사야 66장 7-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7-8절입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이 말씀의 의미는, 7년 대환난의 ‘진통’이 있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이 한 나라로 세워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회복되어 지금 이 땅에 있지만 이스라엘의 진짜 회복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때 일어납니다(슥 12:10, 13:1, 롬 11:26-27).   19절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이 말씀은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적그리스도로부터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복음 전도자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파할 것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도피한 자(들)’은 적그리스도로부터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복음 전도자들을 말합니다.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하나님은 14만 4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워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계 7장), 그들 중에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죽임당할 사람도 있고 살아남을 사람도 있습니다. 19절은 살아남을 사람들이 온 세계로 흩어져서 복음 전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마 24:14).   나머지 말씀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심판(15-17, 24a절), 천년왕국(10-14, 18, 20-21, 23절), 영원한 불못(24b절), ‘새 하늘과 새 땅’(22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이 일어나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예언서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미래의 다른 두 사건을 함께 말하기도 하는데(24절) 이런 것을 ‘이중예언’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과 ‘작은 성경’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거의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기록된 대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일과 그 후에 있을 일입니다. 세상 되어 가는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이 땅에 있는 것만 봐도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벧후 3:11-13).
0
0
21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토피아’(이상향, 지상낙원)를 꿈꾸어 왔습니다.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고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유토피아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토피아가 있습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65:20-23). 이 말씀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인데, 천년왕국이야 말로 사람들이 꿈꾸어 온 유토피아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해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받은 사람은 부활하게 되고, 부활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년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교회 시대가 영적인 천년왕국 시대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을 ‘무(無)천년설’이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은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의하면, 천년왕국 기간 동안 사탄은 결박당해 있습니다. 지금이 천년왕국 시대라면 사탄은 지금 결박당해 있어야 하는데 사탄이 지금 결박당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 시대는 천년왕국 기간이 아닙니다. 또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의하면,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적그리스도(‘짐승’)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는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영적인 천년왕국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천년왕국입니다.   천년왕국은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고 난 뒤에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재림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 19장에 기록되어 있고,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지상으로 재림하십니다. 그렇게 믿는 것을 ‘전(前)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전천년설입니다.   천년왕국 기간이 끝나면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집니다(계 21:1). ‘새 하늘’에서 ‘거룩한 성(城)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계 21:2) 그 성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천국성입니다.   유토피아는 있습니다. 천국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0
0
8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다윗은 위대한 시인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 중에서 제일 유명한 시는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시편 23편은 읽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며칠 전에 췌장암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분을 뵙고 왔습니다. 오래 전에 같은 교회에서 섬겼던 분입니다. 그분에게 어떤 말씀을 읽어드릴까 생각하다가, 시편 23편을 읽어드렸습니다.   시편 27편 1-4절도 다윗의 탁월한 시입니다. 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3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빛’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흑암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빛이 보인다면 그 빛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빛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둘째는 ‘나의 구원’입니다. 큰 위기를 당해 죽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고 구해준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셋째는 ‘내 생명의 능력’입니다. ‘내 생명의 능력’은 내 생명을 지탱해주시는 분, 내 생명을 보호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저와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일까요?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이 되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2절 말씀입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악인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누가 다윗을 보호해주었을까요? 하나님입니다.   3절입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56편 1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4절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소원은 한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소를 말합니다. 그 당시 성소는 천막이었습니다. ‘성전’은 다윗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성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했을 때(삼하 7:1-2)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 집안의 왕위가 영원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삼하 7:11b-13, 16). 이 약속에 의해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이 놀라운 복을 받은 이유는 4절 말씀에 나타나 있는 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을 무한한 기쁨과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0
0
13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29일
In 금요 묵상
평안과 기쁨의 삶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입니다.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다면 건강도 돈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이 말하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위한 권면을 들어봅시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싱글벙글거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슬픈 일도 있기 때문에 항상 싱글벙글거릴 수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했는데, 감옥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상황을 바라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롬 8:28).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은 속으로만 관용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마지못해 관용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관용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가깝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말은 주님 만날 날이 가깝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재림하실 때 휴거되어 만나든지, 죽음을 통해 만나든지. 어떤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 날이 가까운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워했다 해도 죽기 전에는 용서하고 죽는 것이 맞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보셨습니까? 한두 번 또는 두세 번 용서해보셨습니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셨습니다. 용서하며 관용하며 삽시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어떤 말씀을 온라인으로 많이 검색했는지 조사한 결과가 나오는데, 거의 매년 제일 많이 검색한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염려할 일도 생기지만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기도할 때는 ‘감사함으로’ 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별일 없이 살게 해주신 것이 감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조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한대로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어떤 일로 마음에 평안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0
0
14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22일
In 금요 묵상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3-5).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고 했는데, ‘첫날’은 예수님을 믿은 첫날 아니면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첫날일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우면서 참여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정말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빌 1:3-4).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한 일에 대해서 바울은 ‘착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일, 제일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영혼이 멸망 길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게 된다면 그것처럼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전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직접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을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이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 즉 복음 전하는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사람이 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전도는 사람이 하지만 전도의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잘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도를 해도 안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도의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마 28:19-20).   빌립보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은혜’라고 표현한 이유는 복음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가 됩시다.
0
0
13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15일
In 금요 묵상
에스더서 3장과 4장에는 유다 사람들이 엄청난 위기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사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죽게 생긴 엄청난 위기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만이라는 사람이 왕의 허락을 받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에 3:13). 정말 무섭고 잔인한 조서입니다. 이 조서가 내려졌을 때 유다 사람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했습니다(에 4:1-3).   유다 사람들이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왕비 에스더가 듣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모르드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모르드개는 왕비 에스더의 사촌오빠이면서 에스더를 딸처럼 키운 사람입니다(에 2:7).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께 나아가 유다 민족을 위해 간구해주기를 원했습니다(에 4:6-8). 그런데 에스더의 말은 “왕께 함부로 나아갈 수 없고, 왕의 허락 없이 나아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1절). 그 말을 들은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3-14절). 이 말에 에스더가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에스더의 이 결단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됩니다. 에스더에게 있어서 ‘별의 순간’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을 때입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의 의미는 ‘별’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나 ‘기도’라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 에스더서를 기록한 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인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유다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위기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모르드개가 생각해낸 것은 왕비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왕이 내린 조서가 취소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잠 21:1).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유다 사람들을 구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에 4:14a).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고전 10:13, 롬 8:28). 넷째,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죽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요 12:24-25).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됩시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0
0
14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08일
In 금요 묵상
‘새 하늘과 새 땅’은 성경에 네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21장 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신구약성경 66권 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이 제일 먼저 나온 책은 이사야서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직접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 1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사 1:1). 100년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사 64:10-11). 100년이 지난 뒤에 유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킨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무덤 사이에 앉았고,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고기를 먹었으며,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 국물을 마시기 위해 그릇에 담았습니다(사 65:4). 그런 죄를 지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이방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사 65:5a). 그런 유다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사 65:5b절, 새번역)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키셨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명맥은 이어지게 해주셨습니다(사 65:8-9).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시켜 주셨고, 메시야 예수님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지만 하나님은 1948년에 다시 일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명맥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는 멸망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막강한 나라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조짐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상당수가 유대인들이고, 세계 최강국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이 이사야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영원히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불에 타서 없어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벧후 3:11-13).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입니다.
0
0
12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01일
In 금요 묵상
시편 119편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충고자’ 역할을 해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제일 긴 장입니다. 22개의 연(문단)으로 되어 있고, 한 연은 여덟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전체가 176구절입니다. 각 연의 각 구절은 동일한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됩니다. 영어로 예를 들면, 첫 번째 연인 1-8절은 각 절이 A로 시작하고, 두 번째 연인 9-16절은 B로 시작하고, 마지막 연인 169-176절은 Z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를 ‘알파벳 시’라고 하는데 알파벳 시는 기억하기가 좋습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몇 구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구절에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119편을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을 무척 사랑한 분임은 틀림없습니다(시 119:72, 103, 127). 다윗도 하나님 말씀을 무척 사랑했는데(시 19:10), 다윗의 표현과 시편 119편의 표현이 비슷한 것을 보면 다윗이 시편 119편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119편의 세 번째 연(17-24절)에 있는 말씀 몇 구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8절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놀라운 것’은 놀라운 진리, 교훈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공부할 때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19절.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시 119:105).   20절.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내 마음’은 히브리어성경에 ‘내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20절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율례들을 늘 사모하다가 쇠약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시인은 잠도 안 자면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시 119:147-148). 그러다가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병이 날 정도였습니다(시 119:131). 하나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22절.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시인은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이런 고초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욥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비방과 멸시를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이 했던 것처럼 계속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3절.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고관들이 비방한 것을 보면 시인은 상당히 고위직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봐도 시편 119편을 기록한 분이 다윗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방당할 때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합시다.   24절.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즐거움’을 주고 ‘충고자’ 역할도 해주는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것은 보통 큰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우리가 됩시다.
0
0
11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24일
In 금요 묵상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술람미’는 성경 전체에서 아가서 6장 13절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술람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해가 가능한데, 하나는 ‘수넴’이라는 지명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또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여성명사로 ‘솔로몬의 여자’라는 뜻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수넴’은 예수님께서 자란 나사렛에서 남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입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사랑했을 때 그에게는 이미 140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아 6:8). 그 수는 나중에 천 명으로 늘어납니다(왕상 11:3).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솔로몬이 제일 사랑한 여자가 술람미 여자였습니다(아 9a).   아가서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보니 아가서에는 읽기에 조금 민망한 표현도 나옵니다(아 4:5, 7:7). 그런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교훈을 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결혼생활에 도움이 필요할 때 아가서를 읽으면 좋습니다. 아가서에는 좋은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1:15, 2:2, 3), 아가서에 나오는 좋은 표현만 잘 사용해도 부부나 연인관계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서를 깊이 읽다보면 예수님이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아가서의 클라이맥스는 아가서 3장입니다. 3장에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가 결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3장은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1-4절). 결혼하기 전날 밤에 술람미 여자는 자기의 임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찾지를 못합니다. 한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습니다. 찾아서는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오는 동안 자기의 임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습니다(4절).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혼하기 전날 밤에 술람미 여자가 꿈을 꾼 내용입니다. 솔로몬 왕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술람미 여자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꿈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5절 말씀은 2장 7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8장 4절에도 나옵니다. 나왔던 말씀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5절 말씀은 후렴구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6절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6절 앞에 후렴구(5절)를 넣은 것입니다. 6-11절에는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오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가마를 타고 오는데, 용사 60명이 가마를 호위하고 있습니다(7-8절). 솔로몬 왕이 탄 가마는 금과 은과 레바논의 나무로 만든 가마입니다(9-10절). 솔로몬 왕의 머리에는 그의 어머니가 씌어준 ‘왕관’이 있습니다(11절).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귀한 물건들도 많이 가지고 오는데(6절), 이는 술람미 여자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입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데려가기 위해 오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모습을 생각나게 해줍니다(살전 4:16-17).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러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요 14:1-3, 계 22:12).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아름답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요일 3:3).
0
0
15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17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63장 15절부터 64장 마지막 절까지에는 하나님께 ‘자비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지만 기도의 내용은 유다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64:10-11).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가 멸망하기 100년 전에 사역을 했던 사람으로서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못 보았는데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감동(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벧후 1:21).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에게 임한 비극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려면 예수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63:17b).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한 것처럼 말하지만(63:17a) 사실은 유다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부하면 내버려두십니다(시 81:11-12, 롬 1:28).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과 한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전 11:9).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유다를 멸망시켰으니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그들을 손봐 달라고 간구합니다(64:1-2).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2-3). 고레스 왕의 말입니다. 고레스가 이 말을 하기 1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고레스가 할 일을 예언했습니다(사 45;1).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64:5). 자신들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알고 있었고 죄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64:6-7). 이것을 알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사람은 죽는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히 9:27).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0
0
8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04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는 ‘므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나’는 금이나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입니다. ‘달란트’도 금이나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인데, 한 달란트는 60므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므나의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절).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당장에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왕은 정치적인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나라로 가실 것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곧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주신 비유가 므나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기 전에 열 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했습니다(13절). ‘귀인’은 예수님을, ‘열 명의 종’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안 계시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지나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온 귀인은 종들을 불러놓고 결산을 합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칭찬의 말과 함께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도 칭찬의 말과 함께 다섯 고을 권세를 주었습니다.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한 므나만 내어놓은 종에게는 책망을 하고(22-23절),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지고 있는 종에게 주었습니다(24-26절). 비유의 마지막 내용은, 귀인을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7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계 19:15-16).   므나의 비유에서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똑 같이 맡긴 ‘한 므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모든 제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 같이 맡긴 것이 무엇일까요? 은사나 재능은 아닙니다. 은사나 재능은 사람마다 받은 것이 다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에서 종들이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것이 은사나 재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 같이 맡긴 것은 ‘복음’입니다(살전 2:4a, 딤전 1:11, 6:20). 복음을 ‘한 므나’에 빗대어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므나는 그렇게 큰돈이 아닙니다. 이왕 비유로 말하는 거, 달란트처럼 큰돈에 빗대어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복음이나 전도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전도는 어떻게 보면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복음도 어떻게 보면 우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롬 1:16-17).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만큼 귀한 길이기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 12:3). 더 많은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준 것처럼 예수님도 더 많이 복음 전한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계 22:12, 살전 2:19).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3절).
0
0
15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3월 27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6장 14-31절에는 바리새인들과 관련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속물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은 좋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했을 때 비웃었습니다(14절).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너희는 위선자들이고, 하나님은 너희의 위선을 미워하신다’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15절).   그 다음 16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구약시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16절 말씀의 의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는 요한이고, 요한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될 것인데 복음이 전파되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시대를 우리는 신약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도 몰랐고, 구약시대가 가고 신약시대가 온 것도 몰랐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성경이 더 이상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17절은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5:17-18). 구약성경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은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요 5:39). 18절에서는 예수님이 갑자기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말 2:16a). 이혼할 때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했는데(신 24:1-2) 그 이유는 이혼 당한 여자를 보호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정욕을 위해 이혼을 밥 먹듯 했으니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19-31절).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14a, 19절). 어떤 사람들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믿는 기독교 계통의 이단들이 주로 비유라고 말하는데, 성경을 보면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막 9:48-49, 계 20:10).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중요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은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창 15:6). 부자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는 방법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 3:16-17).   그런데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구원받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 중의 하나가 돈입니다(눅 18:25). 그래서 예수님이 돈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믿음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마 6:33, 시 39:6-7).
0
0
14
강 효민강 효민

강 효민

管理者
담임 목사님
+4
その他

本サイトは、Eメールアドレスを不正に取り扱う行為を拒否します。 【法律第84865号】

 

右)11902京畿道九里市カモメ循環路88(ガルメドン)

TEL/ 031) 574-0135 FAX/ 070) 8836-9291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