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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게시물

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5월 02일
In 금요 묵상
사도행전 2장 1-13절에는 오순절 날 성령이 처음으로 임한 것과 성령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은 구약성경의 칠칠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칠칠’은 일곱 날이 일곱 번이라는 말이고, 거기에 하루를 더하면 50일이 됩니다. ‘오순(五旬)’은 50이라는 말입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각지로부터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면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1-3절). 그런 방식으로 임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고(4절) 그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5-8, 12절). 제자들은 다른 나라에 가본 적도 없고,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말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11절).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역사로 갑자기 하게 된 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려면 언어가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전도 목적이 아닌 기도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말씀은 방언의 성격이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했고 방언으로 기도하니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하기보다 예언을 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4:1, 5, 9).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을 봐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바로 앞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에 대해 말한 이유는 방언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방언을 자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19, 23절). 자제시키려고 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기도가 아니라 전도입니다(고전 14:22). 방언은 이 땅에 있는 언어였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행 2:4, 11).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의미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이 보여주듯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방언을 말했는데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사도시대에 일시적으로 있다가 지금은 사라졌습니다(고전 13:8, 히 2:4).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하려고 하기보다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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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4월 25일
In 금요 묵상
신명기 33장 29절에서 모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행복한 사람’으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시고 돕는 자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음 내용인 신명기 34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행복한 사람으로 표현한 모세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일을 40년 동안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멀리서 보게만 하셨습니다(1-4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겠지만 감사하다는 생각이 더 컸을 것입니다. 둘째, 장수했고 죽는 순간까지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는데 죽는 날에도 느보 산을 오를 만큼 건강했고 시력도 좋았습니다(7절). 요즘은 ‘120세 시대’라고 하는데 120세 시대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 모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직접 장사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 장사지내 주셨습니다(5-6절).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시신이나 무덤을 우상화하거나 신성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장사지내 준 사람은 모세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30일 동안 애곡했습니다(8절). 사람의 가치는 죽고 난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슬퍼하느냐, 얼마나 오래 슬퍼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었는데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것입니다. 다섯째, 뒤를 이을 후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 입구까지 잘 이끌고 왔는데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들어갈 인도자가 없다면 모세가 편안하게 눈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9절). 이것은 모세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을 잘해서 잘 일으켜놨는데 은퇴할 때 그 사업을 물려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또 누군가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사람이 사업을 잘못해서 말아먹었다면 그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써서 교회를 잘 세워놓았는데 20~30년 뒤에 교회를 이끌고 갈 사람이 없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복음 전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사람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딤후 2:1-2). 여섯째, 모세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평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 했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한 자’라고 했습니다(10-12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모세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사람’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시고 돕는 자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기에 우리도 사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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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4월 18일
In 금요 묵상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그들의 땅에서 풍족하고 평안히 살게 되지만,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신 28:36-37). 다른 나라로 끌려가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시고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신명기 30장 1-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선을 행하셔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그들과 그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여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6절). 마음에 할례를 베푼다는 말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창 17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신 이유는 그 백성 중에서 메시야를 나오게 해서 메시야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2:2-3).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9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6b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의 적군과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7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9-10절). 하나님은 이 말씀을 지키셨습니까, 안 지키셨습니까? 지키셨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을 때 다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온 유다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이방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결국 서기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온 세계로 흩어져서 고통의 삶을 살던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고토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이 이 땅 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지만 신명기 30장 1-10절에서 하신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는데(5절)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오신지 2천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겠다는 말씀(6절)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은 언제 이루어질까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집니다(막 13:26-27, 렘 31:31-34, 32:37-41, 롬 11:26-27). 2천 년 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 이 땅에 있는 것이나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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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4월 05일
In 금요 묵상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지은 시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계속 쫓아다닌다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은 그런 생활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시가 시편 57편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몸을 피한 곳은 ‘굴’이었지만 그의 영혼이 피한 곳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였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어려운 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다.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다윗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분입니다. 내 삶에 고통이 있다 해도 하나님은 그 고통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실 것입니다(롬 8:28). 고통당할 때는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왜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 바른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시편 57편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은 5절과 11절입니다. 두 구절의 내용이 정확하게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 11절). 다윗은 하나님이 하늘 높이 들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소원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다윗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7-8절). 이것은 다윗의 결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새벽을 깨우겠다고 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말은 시적인 표현으로 ‘내가 새벽 전에 일어나서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말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새벽 전에 일어나서 찬양만 한 것이 아니라 성경도 읽고 기도도 했습니다(시 5:3, 63:5b-7a). 이런 다윗을 본 받아서 우리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됩시다. 새벽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됩시다.   9절에서 다윗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의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굴에 숨어 있었지만 그에게는 ‘만민 중에서’, ‘뭇 나라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다윗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다윗의 시가 읽혀지고 있고, 다윗의 시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데, 다윗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57편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왜 다윗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복을 주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기 원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하나님을 높이려는 사람,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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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3월 28일
In 금요 묵상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된 말씀이 많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a절) 하는 말씀은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절) 하는 말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마 27:39-44).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절) 하는 말씀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8절) 하는 말씀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 뽑은 것과 비슷합니다(마 27:35-36).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천 년 전에 다윗이 기록한 글입니다. 천 년 전에 이런 글을 기록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30-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이 메시야의 부활에 대해 한 말(시 16:10)과 관련해서 베드로가 한 말인데,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했고, “미리 본 고로” 다윗이 메시야의 부활에 대해 기록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리 보았다’는 말은 다윗의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다윗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벧후 1:21).   다윗이 예수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처럼 말한 것은 사실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것입니다(1-2절). 다윗이 어떤 고통 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연상시키는 말을 한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 다윗은 상징적인 표현을 써서 자신의 고통을 나타냈지만 하나님은 그 표현들을 예수님에게 문자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감을 주어 그렇게 표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3-5절). 다윗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을 찬송했습니다. 이런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지만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부르는 찬송이 진짜 찬송입니다. 다윗은 고통에서 구원해달라는 기도도 했습니다(19-21a절).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21b절).   고통에서 벗어난 다윗은 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내용은 2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면 기쁨으로 찬송하게 해주신다. 고통을 안 당해도 되는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기꺼이 고통당하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여주셨고 찬양의 대상이 되게 해주셨습니다(빌 2:9-11).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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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3월 21일
In 금요 묵상
시편 10편은 익명의 한 시인이 악한 자를 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서 시인은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도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잠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지 숨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하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2절에서 시인은 악한 자로 하여금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3-4절에서는 악인이 자기 마음에 있는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님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악인은 오히려 그의 대적을 보고 코웃음만 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내가 망하는가, 두고 봐라. 나에게는 언제라도 불행과 저주란 없다’ 하고 말합니다”(5-6절, 새번역). 악을 행해도 벌이 임하지 않으니 마음 놓고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전 8:11). 악인들은 말도 함부로 합니다. “그들의 입은 기만과 폭언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합니다”(7절, 새번역).   8-10절은 악인이 가련한 자를 사냥하는 내용입니다. 악인은 자기의 욕망을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삼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성폭행하기 위해 지나가는 여자에게 돌려차기를 하지 않나, 죽이기를 하지 않나…. 악인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열매 따먹는 것도 보셨고, 가인이 아벨 죽이는 것도 보셨습니다. 다윗이 죄 짓는 것도 보셨고, 우리가 죄 짓는 것도 보고 계십니다(잠 15:3). 12절에서 시인은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해 주시고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힘없는 자들, 고난당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13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문은 우리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면 바로 벌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서러움, 이 억울함을 당신은 보셨습니다. 손수 그들을 붙들어주시니 당신은 가엾은 자들의 의지이시며 고아들의 도움이시옵니다”(공동번역).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시인이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계시고 돕고 계십니다. 15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팔을 꺾어주시고, 악을 샅샅이 찾아서 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악한 사람을 보면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기 때문에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어떤 성경은 미래형을 써서 ‘멸망할 것이다(사라질 것이다)’로 번역했습니다. 번역을 과거형으로 했던 미래형으로 했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악인을 사라지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참 감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또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편 10편을 마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17-18절, 새번역).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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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3월 14일
In 금요 묵상
시편 9편은 다윗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드린 찬양과 기도입니다. 다윗이 어떤 고통 중에 있었는지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다윗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방 나라의 왕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시편 9편에 ‘이방 나라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5, 15, 17, 19, 20절). 고통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도 청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1-2절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I will(~할 것입니다)’이 네 번 나옵니다. 네 번의 ‘I will’은 ‘나는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할 것입니다’ ‘나는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할 것입니다’ ‘나는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나는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할 것입니다’입니다. 이런 결심을 우리도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3-6절에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는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감사하고 찬양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7-8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공의롭지 못한 일이 많을까요? 착한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언젠가는 반드시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9-1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고 환난 때에 요새가 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환난 때에 하나님께 피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11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백성 중에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말합니다. ‘백성’이 새번역성경에는 ‘만민’, 우리말성경에는 ‘온 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두 가지 권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른 말로는 ‘예배’와 ‘전도’라고 합니다.   12절에서 다윗은 이런 말을 합니다. “무죄한 피를 갚으시는 분께서 그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불쌍한 이의 울부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공동번역). 세상에는 공의롭지 않게 보이는 일도 많지만 이 말씀이 착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13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내용입니다. 나의 고통을 보시고 나를 도와주시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습니까?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고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14절). 그런데 다윗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1-6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그렇게 했습니다(합 3:17-18).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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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3월 07일
In 금요 묵상
시편 8편은 다윗이 기록한 시입니다. 언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다가 기록했다고 생각됩니다.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새번역성경은 3절 끝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많은 시를 썼습니다. 밤하늘의 별들과 관련해서 제일 유명한 시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윤동주 시인이 24살 때 지은 시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윤동주 시인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어릴 적 추억과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시인 다윗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입니다. 1절과 9절에서 다윗은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아름답다’로 번역된 말의 원래 의미는 ‘위엄이 넘친다, 장엄하다’입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어린 아이들을 통해 원수들을 잠잠하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찬양하게 하셨으니 주께서 대적들과 원수들과 보복하는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우리말성경). 어린 아이들을 통해 원수들을 잠잠하게 하신 예로 어떤 것이 생각납니까? 소년 다윗이 거인 장수 골리앗을 때려눕힌 것이 생각납니다(삼상 17:33, 42, 45-47). 그리고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봤지만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양한 것도 생각납니다(마 21:15-16).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달과 별들을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크고 위대하시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섬기고 있으니 보통 큰 영광이 아닙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절).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생각해주셨는지는 만물을 발 아래 두고 다스리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6-8절).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탁월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절).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성경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시 49:20). 사람은 사람으로서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사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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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2월 22일
In 금요 묵상
시편 7편은 다윗이 베냐민 사람 구시가 한 말을 듣고 하나님께 드린 노래입니다. 구시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사울 왕 곁에서 다윗을 모함했던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1-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사자 같이 찢고 뜯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위급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단 2:13, 17-18). 초대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도 제일 먼저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행 4:23-24a).   3-5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 말합니다. 나에게 잘못이 있으면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5절)라고 했습니다.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라는 말은 나를 죽여서 먼지가 되게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잠 28:9). 이런 의미에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마 5:23-24).   6-7절에서 다윗은 ‘내 대적들을 심판해 달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주소서라는 말입니다(새번역).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변호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예수님입니다(롬 8:33-34, 히 2:18).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9-1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분’(9절),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10절), ‘죄에 대해서는 매일 분노하시는 분’(11절)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이런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죄를 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12-13절에서 다윗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활이나 칼로 죽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인데,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잠 28:13). 다윗도 훗날 간음죄와 살인죄라는 큰 죄를 짓지만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용서해주셨습니다(시 32:5). 죄를 지으면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요일 1:9).   14-16절에서 다윗은 ‘악인의 죄악은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죽은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을 찌르려고 했던 사울의 칼은 자신을 찔렀습니다(삼상 31:4-6). 다니엘을 사자 밥으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은 도리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단 6:24).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높은 나무를 세웠지만 그 나무에 달려죽은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 악을 꾸미거나 행하면 그 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잠 26:27).   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각오를 말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이런 점이 다윗의 훌륭한 점입니다. 이런 각오로 살면 기도를 해도 더 잘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삽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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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2월 01일
In 금요 묵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민족들처럼 인간 왕을 원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을 세울 때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는지, 왕이 될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신명기 17장 14-20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울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15a절).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을 뽑을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기도입니다. 둘째는 자국인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15b절). 그 이유는 타국인을 세우면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지도자를 뽑을 때 우상숭배 하지 않을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무조건 기독교인을 뽑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인들 중에는 무늬만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후보자의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보자가 사람들을 우상숭배 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도 성경의 가치관과 역행하는 사람이라면 뽑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성경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왕이 될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고, 병마를 얻으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가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6절).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한 이유는 병마를 많이 두다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병마를 더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마를 얻으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가게 하지 말라고 한 이유도 동일합니다(사 31:1). 예나 지금이나 나라들은 전쟁에서 이기려고 병마를 준비하지만 이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잠 21:31). 북한의 김정은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시 20:7-8, 33:16-19). 방어 차원에서 우리나라도 무기를 안 만들 수 없지만, 이김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둘째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7a절). 그 이유는 마음이 미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미혹된다는 말은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나중에는 우상숭배 하는 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아내를 많이 두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1:3-5). 하나님은 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기를 원합니다(신 6:5). 셋째는 은금을 많이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7b절). 은금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하나님보다 은금을 더 의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적당히 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적당히 있는 것입니다(딤전 6:8).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 많은 재물을 주시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마 6:19-21).   왕이 될 사람이 평생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18-19절). 그렇게 하면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되고, 그와 그의 자손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0절).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평생 내 옆에 두고 읽으면서 그 말씀대로 삽시다. 그것이 복 받는 비결이고 잘되는 비결입니다(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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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월 18일
In 금요 묵상
신명기 8장 11-20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을 잊지 말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을 합니다(11b, 14a, 18a절). 하나님을 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11절). 사람이 하나님을 잊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증상은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잘 나타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12-14a절)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져도 교만하면 안 됩니다.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17-18a절). 재물이 많아져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18a절) 하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삽시다. 재물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고전 4:7).   잠언 30장 8b절에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기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부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누구냐?’ 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잠 30:9). 아굴은 사람의 연약함을 잘 파악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인 수는 해가 갈수록 줄고 있는데, 그 이유는 좀 살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때는 먹고 살기 바빠도 나름대로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놀기 바쁘고 즐기기 바쁩니다. 종교생활을 할 시간도 없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 없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만큼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는 점점 많아지고 있고, 신앙생활을 문화생활이나 취미생활 하듯 하는 이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14b-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됩니다(19절).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게 절을 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모세가 우상 숭배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재물의 신과 쾌락의 신을 섬기게 됩니다(눅 16:13b, 골 3:5). 그런데 그렇게 되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20절). 재물이 오늘날 많은 사람의 우상이 되었지만 재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끝까지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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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월 11일
In 금요 묵상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출 20:8, 신 5:12).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쉼(안식)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출 20:11). 하나님은 천지를 6일에 걸쳐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습니다(창 2:1-3).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쉼(안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부터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출 13:23-25). 그런데 그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출 16:26-27). 그래서 주신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신명기 5장 15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는 제대로 쉬지도 못 하고 일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으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꿈도 못 꿨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출애굽하여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이 몸에 배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사람답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쉬라고 하면 듣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쉬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27).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출 31:12-13, 16-17; 시 147:19-20). 둘째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지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고 ‘몸(실체)’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골 2:16-17).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으면 그림자인 안식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2:8).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지만 ‘안식일의 정신’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안식일 정신이란, 1주일에 하루는 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날로는 어느 요일이 좋을까요? 당연히 일요일입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시절부터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고전 16:1-2, 행 20:7a). 그렇다고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드린다고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롬 14:5). 예배는 어느요일에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초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인들은 2천년 가까이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켜왔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안식일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켰다.” 오늘날 우리도 1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쉬면서 예배드리는 삶을 산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일만큼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삶의 철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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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월 04일
In 금요 묵상
신명기 1장 29b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무서워한 이유는 그들은 장대하고 그들의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높았기 때문입니다(신 1:28b). 그 땅에는 아낙 자손도 살고 있었는데 아낙 자손은 거인 족속입니다. 그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신명기 1장 30-3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읽어보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신 1:3).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천천히 가도 한 달이면 갈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민 14:34).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한 이유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장 19-33절에 기록된 말씀은 그 일을 회상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19절을 보면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우리가 살아온 날도 ‘크고 두려운 광야’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고생을 많이 한 분들은 금방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고생을 많이 안 한 분들도 한 해 한 해 사는 것이 광야를 지나는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a절에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차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2024년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과 같습니다. 2024년에 어떤 일이 있을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있지만 염려와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신명기 1장 21b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무서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두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너희보다 먼저 가셔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30절)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하나님은 너희를 안고 이곳까지 오셨다(31절)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운 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앞서 가시면서 그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33절).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지금 이 시간까지 와주신 분입니다(31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그 시간들을 지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사 46:3-4). 하나님은 또한 우리 앞서 가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30, 33절).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2024년이 어떤 해가 될지 모르지만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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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2월 21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서에는 메시야를 ‘종’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네 군데에 나옵니다. 그 네 말씀을 신학도들은 ‘종의 노래’라고 합니다. 종의 노래는 42장 1-7절, 49장 1-7절, 50장 4-11절, 그리고 이사야 53장에 나옵니다. 제일 유명한 것은 네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인 이사야 50장 4-1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10절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10a절). 여기서 ‘그의 종’은 메시야입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4절) 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나’는 메시야입니다. 4-9절은 메시야의 독백입니다. 메시야 예수님은 가르치는 사역을 많이 하셨고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역을 잘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5-6절,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700년 뒤에 예수님이 당한 일과 놀랍게 일치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7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높여주셨는지는 빌립보서 2장 9-11절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8-9절,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메시야의 ‘대적’, 메시야를 ‘정죄’하는 자들은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10a절,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이 말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라’는 말입니다.   10b절,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도록 하나님께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흑암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빛 되신 메시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사 9:2, 42:7).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11절,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11절).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빛으로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이 있는 곳’에 눕게 되는데 그곳은 영원한 불못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빛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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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2월 14일
In 금요 묵상
시편 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통당할 때 지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다윗은 지금 건강 상태가 대단히 안 좋습니다. 3절에서는 영혼이 매우 떨린다고 했는데 다윗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4-5절에서는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말합니다. ‘무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저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죽으면 ‘주님을 기억’ 못하고 ‘주님께 감사’도 못한다는 말인데, 다윗이 지금 그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천국을 믿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시 23:6). 5절의 핵심은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더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고통을 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다윗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는데, 다윗의 ‘탄식’은 죄에 대한 것이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는 말은 밤마다 눈물로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7-8절에 ‘내 모든 대적’ ‘악을 행하는 너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을 보면 다윗의 주변에는 다윗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과 몸이 병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 때문에 고통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의 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한 것입니다. 그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삼하 12:10-11). 그 벌로 다윗의 집안에는 안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장남 암논은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죽입니다. 몇 년 뒤에는 압살롬이 아버지를 대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윗은 도망가는 신세가 됩니다. 왕궁을 접수한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죄를 범합니다(삼하 16:22). 압살롬은 결국 죽임을 당하는데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무척 슬퍼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면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죄로 인한 벌로 몸과 마음이 고통당할 때 지은 시가 시편 6편입니다. 고통당하면서 다윗은 눈물로 회개합니다(6절).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다윗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9-10절).   시편 6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죄를 지으면 고통이 따르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신다고 고통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용서받았지만 그의 삶에는 많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다윗은 많은 시를 지을 수 있었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고통도 귀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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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2월 07일
In 금요 묵상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편 5편은 다윗이 기록한 시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당할 때 기록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4-6절을 보면 ‘오만한 자들’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에 대해 다윗이 말을 하는데 그런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지금 다윗의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는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라고 했는데, ‘그들’은 다윗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로 인해 고통당할 때 다윗은 두 가지를 했습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1-2절).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요 자신의 왕인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도 되시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실생활에서는 내가 왕인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는데,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을 고백하면서 살아갑시다. 다윗은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b절),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10a절)라는 기도도 했습니다. 또한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절)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다윗은 주로 아침에 기도했습니다.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침은 조용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을 것입니다(막 1:35).   사람들로 인해 고통당할 때 다윗이 한 또 다른 일은 예배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절). 그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는데 어떻게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고 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법궤가 모셔져 있는 천막, 아니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을 성전, 아니면 하늘(천국)에 있는 성전(시 11:4)입니다. 7절 앞부분에 있는 ‘주의 집’을 법궤가 있는 천막으로 이해하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을 성전이나 하늘에 있는 성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NASB 영어성경과 <히브리어∙헬라어 직역성경>은 ‘성전을 향하여’라는 말을 ‘성전에서’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 있는 ‘주의 집’과 뒤에 있는 ‘성전’은 같은 장소 곧 법궤가 모셔져 있는 천막이 됩니다. 어느 번역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7절의 핵심은 다윗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다윗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예배부터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단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예배를 더 잘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셔서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당장 도와주시지 않아도 예배를 통해 위로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욥 1:20-21). 그것이 욥의 위대한 점입니다.   시편 5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고 지켜주시는지를 말씀하면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지켜주십니다(11절).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의인’으로 봐주십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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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2월 01일
In 금요 묵상
욥기 6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이 친구들에게 한 말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아 고통당한다고 생각하면서 욥을 정죄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한 말 중에는 옳은 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은 욥에게 고통이 될 뿐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과는 관계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왜 고통당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으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욥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으면 옳은 말도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옳은 말’이, 나의 입바른 소리가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욥기 6장 29a절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행악자가 되지 말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불의가 없게 하라, 불의한 일을 하지 말라’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그것을 좀 강하게 번역해서 ‘행악자가 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태도나 말로도 불의를 행할 수 있고 ‘행악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만큼 나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주로 무엇으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킵니까? 말로 실족시킵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신체로 하는 폭행만 폭행이 아니라 말로 하는 폭행도 대단히 나쁜 폭행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욥기 7장 3-5절에서 욥은 자기의 고통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욥은 ‘여러 달째’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이 하나님께 말을 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 이 말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하는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욥도 사람인지라 인내가 한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욥이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불평하면 불평도 기도입니다. 기도로 힘든 마음을 토로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해해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죄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주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욥 7:12-15, 표준새번역).   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고통당할 때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고통당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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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1월 23일
In 금요 묵상
시편 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구성이나 내용이 시편 3편과 비슷한 것을 보면 시편 3편과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시입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주께서 나를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이 곤경에서 나를 빼내 주소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고통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라고 말합니다. 왕을 반역하는 것은 왕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헛된 일을 좋아하는 것이고, 거짓을 구하는(따르는)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3a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운 것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왕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다윗이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울 왕이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삼상 24:10, 26:11).   이어서 다윗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b절)라고 했습니다. 이 확신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 데서 온 것입니다(시 66:18-19).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잠 28:9, 사 59:1-2).   다윗은 반역자들에게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4a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범죄하지 말라’ 아니면 ‘(나에 대해) 분노하면서 범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느 것이든 결론은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4b절)라는 말은 ‘누워서 잘 생각해보라, 누워서 잘 생각해보면 너희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5절의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라는 말은 ‘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가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하겠느냐?”라고 물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7-8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을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드린 기도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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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1월 16일
In 금요 묵상
사람은 적이 없어야 하는데 살다보면 적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적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시편 3편을 기록한 다윗 왕에게도 적이 많았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아들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아들이 ‘대적’이 되었으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이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이 한 말이 시편 3편 1절입니다.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힘든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고, 왕위를 지켜줄 것이고, 명예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확신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4절)라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다윗에게 방패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방패가 되어 주시고, 다윗의 머리를 들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머리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청했더니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어려운 일이 있고 근심이 있으면 사실 잠이 잘 안 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염려할 일이 있어도 염려 대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지 않는다 해도 우리 마음에 평안은 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다윗은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절). 정말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평안도 주셨고 두려움도 사라지게 해주셨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네 마음에 근심 있느냐/ 어둠길로 행하느냐/ 우리 주 예수 바라봄으로 밝은 빛 찾아오리/ 눈을 주님께 돌려 그 놀라운 얼굴 보라/ 주님 은혜 영광의 빛 앞에 세상 근심은 사라지네.” 그렇습니다. 주님 바라보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 세상 근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7절에서 다윗은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주신 것처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막 11:24).   힘든 일이 있으면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합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구원과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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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3년 11월 03일
In 금요 묵상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 시편 1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시편 2편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시편 2편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많이 인용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시편 2편을 기록한 분은 다윗입니다. 사도행전 4장 25-2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5-26절은 시편 2편 1-2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편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1-3절은 이방 나라들이 다윗의 후손 왕을 대적하고 공격하려는 것을 묘사합니다. 2절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다윗의 후손 왕을 말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메시야)’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만왕의 왕 메시야가 나오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3절은 메시야 예수님을 사람들이 대적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행 4:25-28).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십니다(4절).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그들을 비웃으셨습니다.   5-6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인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5절). ‘분을 발하며 진노’한다는 말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천년 동안 다스리시는데 6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의 ‘나’는 하나님이고, ‘나의 왕’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룩한 산 시온’은 성전이 세워질 산입니다. 성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지금은 모스크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곳에 성전이 있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사 2:2-5).   7절은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전한 말씀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요?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사무엘하 7장 13-14a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대해서 하신 말씀(삼하 7:13-14)을 다윗이 전달한 말씀이 7절입니다. 솔로몬에 대해서 하신 이 말씀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무엘하 7장 15-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을 사도행전 13장 33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인용하고, 히브리서 1장 5절과 5장 5절은 예수님의 우월성과 관련해서 인용합니다. 8-9절도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대적자들을 ‘철장으로’ 다스릴 것입니다(계 19:15).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것입니다(계 2:26-27).   10-12a절은 세상의 군왕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은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라, 예수님께 굴복하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왕의 왕께는 복종하고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10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노’를 당해 망하게 됩니다(12b절). 시편 2편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12b절) 하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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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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