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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30일
In 금요 묵상
여호수아 20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피의 보복자’를 피해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된 성읍입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3절).
도피성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1장, 민수기 35장, 신명기 19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3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을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마 10:29).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은 요단강 동쪽에 세 개, 요단강 서쪽에 세 개 있었습니다(민 35:9-15). 여섯 개의 성읍은 다 레위인들이 사는 성읍입니다(민 35:6). 신명기 19장 3절과 6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도망가는 중에 죽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아놓으라는 말씀을 합니다.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라못, 골란입니다(7-8절).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에 도착하면 성읍 문 어귀(입구)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한 일을 말해야 하고, 성읍의 장로들은 성읍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성읍의 한 곳에서 살게 해줘야 합니다(4-5절). 언제까지 살게 해줘야 하는가 하면,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살게 해줘야 합니다(6절).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말 실수로 죽였는지 아니면 고의로 죽였는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실수로 죽인 것이 확실하면 그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읍에서 살아야 합니다. 6절의 ‘또는’은 ‘그리고’로 바꾸어야 더 좋은 번역이 됩니다. 새번역성경이 6절을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그 살인자는 그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 나왔던 성읍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민수기 35장 24-28절과 32절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를 만든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해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감금해두기 위함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해도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과실치사죄’를 범한 것입니다. 과실치사죄에는 벌이 있습니다. 살인죄보다는 가볍지만 어느 정도의 벌은 받아야 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안에 있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수로 사람을 죽였어도 죽은 사람의 목숨 값은 지불되어야 했습니다(민 35:33).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즉 대제사장이 대신 목숨 값을 지불할 때까지 도피성에 있게 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목숨 값을 대신 지불한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히 2:17, 7:27). 사람을 죽인 사람이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고전 15:22, 롬 5:18). 예수님은 죄를 지은 모든 사람에게 도피성이 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마 11:28, 히 7:25, 행 4: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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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23일
In 금요 묵상
여호수아 16장과 17장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두 아들 이름인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요셉은 안 들어가고 요셉의 두 아들이 들어가는 이유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창 48:5-6). 여호수아 16장과 17장 내용 중에서 세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분배받은 내용입니다(17:3-4). 모세가 살았을 때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를 찾아가서 자기 아버지는 아들이 없으니 아들이 받아야 할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민 27:3-7). 그 약속을 근거로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했고, 여호수아는 주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서 만드셨지만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시지는 않습니다(갈 3:28). 남자와 여자를 구별은 하시는데, 구별하시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녀평등은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은 하되 차별은 하면 안 됩니다.
둘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내용입니다(16:10, 17:12-13).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처음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종으로 부릴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7:16, 20:17-18).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진멸했어야 했습니다. 힘이 없다면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해서라도 진멸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할 힘이 생겼을 때는 종으로 부릴 생각으로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삿 2:2-3).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살전 5:19-22).
셋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땅 분배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내용입니다(17:14).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분배받은 땅이 작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여호수아는 땅이 좁으면 삼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라고 했습니다(15절). 여호수아의 말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골짜기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쫓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16절). 여호수아는 “그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어도 너희가 능히 쫓아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18b절). 맞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에 능히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쫓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갈렙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갈렙은 하나님을 보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철 병거를 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개척 정신을 가지고 삽시다(17:15b, 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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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16일
In 금요 묵상
예루살렘의 ‘예루’는 터, ‘살렘’은 평화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평화와 거리가 먼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말로 ‘시온’이 있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이 세워진 산(790m)의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사람은 다윗 왕입니다(삼하 5:7).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수 15:63).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여러 번 멸망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기원전 331년에 헬라 제국에 멸망했고, 서기 70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멸망해도 예루살렘은 다시 일어났고, 1948년 5월 14일에 예루살렘은 주권국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멸망한지 2천 년이 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래 전부터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해왔습니다. 이사야 62장도 그런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사야 62장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영광을 위해 계속 외치고 기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이방나라들이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3절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랑과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은 사람들이 다시는 예루살렘을 ‘버림받은 자’, ‘황무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황무지’를 새번역성경은 ‘버림받은 아내’로 번역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헵시바’와 ‘쁄라’라고 부를 것이라고도 했는데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뿔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네 땅이 결혼한 여자처럼 될 것”이라는 말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기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5절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기뻐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데 ‘네 아들들’을 우리말성경은 ‘너를 지으신 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6a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파수꾼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을 잘 지키도록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파수꾼이 성을 잘 지킨다 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시 127:1) 하나님께서 파수꾼들로 하여금 성을 잘 지키도록 하셨다니 이것은 예루살렘이 안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6b-7절이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데 6b-7절은 너희가 예루살렘을 위해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8-9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이방인들과 원수들로부터 보호해주실 것을 말하고, 10절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11절은 메시야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계 19:14, 슥 14:4a). 마지막 12절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그 거민을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 ‘찾은바 된 자’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고 부를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62장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사 2:4, 11:6-8). 구원받은 우리도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계 21장). 예루살렘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시 1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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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08일
In 금요 묵상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은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6일간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뒤에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성을 돌아야 하는 사람들은 ‘모든 군사’와 양각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가 60만 명이었습니다(민 26:51). 60만 명이 다 여리고 성을 돌면 복잡해서 안 되고, 제 생각에는 60만 명 중에서 차출된 몇 만 명 아니면 몇 천 명이 돌았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의 대형(隊形)은 제일 앞에 ‘무장한 자들’이 서고, 그 뒤에 양각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 그 뒤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그 뒤에 ‘후군’(후위대)이 서는 것입니다(수 6:6-9). 이런 대형으로 7일간 돌고 큰 소리로 외치면 성이 무너질까요? 이런 방법으로 성이 무너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 보시려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한 이유나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하시는데 시험에 통과하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삼상 15:22-23a).
“여리고 성을 돌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을 돌다가 누군가가 부정적인 말이나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이 안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4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 이유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말에 휩쓸려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민 13:31, 14:1-3, 28-30, 34).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말이나 믿음 없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잠 4:24, 18:7).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가 망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매일 이런 기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11-14절).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6일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안 빠지고 나오는 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15절).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여리고 성이 그렇게 큰 성은 아니었습니다. 일곱 바퀴를 돌려면 세 시간 반이 걸리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군인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대로 했습니다. 성을 돌 때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실천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참 신실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에도 자기가 맡은 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교회는 그런 분들 때문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라고 말씀 하셨는데 ‘충성’은 신실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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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02일
In 금요 묵상
여호수아 1장 1-9절에는 모세가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2백만 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당시 요단강은 강폭도 넓고 물살도 빨랐습니다. 그런 강을 무슨 수로 건널 수 있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야 하는데 그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3-6a절). 이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는 힘이 났을 것입니다.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은 여호수아 개인에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여호수아가 지도자였고, 여호수아에게 이 말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한 사람을 통해 일하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정착시킬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은 여호수아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중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사사를 세워 구해주셨습니다.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에게 모욕당할 때 하나님은 소년 다윗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 한 사람을,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사도 바울 한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이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지는 데는 이승만 한 사람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 나라의 부흥과 발전에도 한 사람이 중요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b)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7-8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네 길이 평탄하고 네가 형통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잘 되기를 원하고 형통하기를 원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6, 7, 9절). 그 이유는 여호수아에게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함께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마 28:19-20).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염려와 두려움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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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2월 19일
In 금요 묵상
시편 109편 1-15절에서 다윗은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언제 시편 109편을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왕이 되기 전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왕이었다면 직접 원수를 처단했겠지만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는 누구일까요? 사울 왕 아니면 사울 왕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부추긴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다윗을 치며, 속이는 혀와 미워하는 말로 다윗을 공격했습니다(2-3절). 2-3절에서는 ‘그들’(복수형)로 표현했지만, 6-13절에서는 한 사람을 의미하는 ‘그’(단수형)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사울 왕 같지는 않습니다. 9-10절에서 다윗은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빌어먹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사울 왕의 ‘자녀’ 중에는 다윗의 친구 요나단도 있고, 다윗의 아내 미갈도 있습니다. 다윗은 친구 요나단을 사랑했고 아내 미갈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이유가 사울 왕이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16:14-16).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을 때는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삼하 1:11-12).
그렇다면 다윗의 원수는 누구일까요? 사울 왕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부추긴 어떤 한 사람과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은혜도 베풀어주었습니다(4-5절). 그런데 그들이 다윗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으니 다윗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주동자인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고 죽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6-13절). 다윗은 그 사람의 조상들 죄까지 기억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14-15절).
이런 기도를 드린 다윗의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저는 이해가 됩니다. 저도 저를 힘들게 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다윗이 드린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드린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은 아닙니다. 미운 사람도 품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다윗도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실수나 잘못을 감추지도 않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이야기와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이야기도 성경은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은 참 정직한 책입니다.
우리에게도 미운 사람이나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수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4절). 다윗이 한 것처럼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직접 원수를 갚으면 안 됩니다(롬 12:19).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원수에 대해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마 5:43-44).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롬 12:20-21). 원수에게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니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는 ‘원수를 갚아 달라’는 기도를 드렸지만,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는 다윗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삼하 16:9-12).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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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2월 12일
In 금요 묵상
아모스 7장 10-17절에는 ‘참된 종’과 ‘거짓 종’이 나옵니다. 참된 종은 아모스 선지자이고, 거짓 종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입니다(10a절).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만들어놓은 금송아지가 있던 곳입니다(왕상 12:28-29). ‘참된 종’과 ‘거짓 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째, 참된 종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지만, 거짓 종은 사람에 의해 세워집니다. 양을 치던 ‘목자’였던 아모스를 불러 선지자로 세운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14-15a절). 반면, 아마샤는 사람에 의해 세워진 엉터리 ‘제사장’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집안 출신인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참된 종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지만, 거짓 종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없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말씀은 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15b-16a절). 반면, 아마샤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참된 종과 거짓 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참된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거짓 종은 사람의 말이나 자기의 생각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때도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은데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셋째, 참된 종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거짓 종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11절)은 이스라엘 왕을 화나게 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모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왕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13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고(행 4:18-20, 5:29),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갈 1:10).
넷째, 참된 종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하지만, 거짓 종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합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라”고 했습니다(12절). 이 말은 ‘거기에서나 밥벌이하라’는 말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밥벌이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모스의 목적이 밥벌이였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말은 안해야 합니다.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말도 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10-11절). 참된 종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하지만, 거짓 종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합니다(빌 3:19, 벧후 2:2-3).
다섯째, 참된 종은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지만, 거짓 종은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아모스는 거짓 종 아마샤의 집안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17절). 거짓 종은 일시적으로는 잘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반대로, 참된 종은 이 땅에서 고난도 당하고 죽임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습니다(계 22:12).
오늘날에도 거짓 종이 참 많습니다. 누가 참된 종이고 누가 거짓 종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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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2월 06일
In 금요 묵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습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마 10:29). 아모스 3장 1-8절에는 세 가지 일에 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보응하시는 이유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응하시는 이유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그들만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만 알았다는 말은 그들만 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주셨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의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의무를 못하면 하나님의 벌이 따릅니다(눅 12:47-48, 히 12:5b-6).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둘째는 성읍에 재앙이 임하는 이유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6절). 어떤 성읍에 재앙이 임했다면 그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내려서 멸망했는데 그렇게 되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도시는 화산폭발로 망했고 어떤 도시는 지진으로 망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도시나 나라에서 홍수나 지진이 발생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끔 듣습니다. 그 일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생사화복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사 45:7). 그러므로 개인도 나라도 잘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신 28:1-6).
셋째는 선지자가 예언하는 이유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8절). 맞는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을 주시고 전하라고 하시면 전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전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합니다(7절). 아모스 선지자는 양을 치는 ‘목자’였지만(암 1:1, 7:14-15)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전하게 하셔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람을 통해서도 성경을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데, 그 일 하는 사람을 ‘목사’ 또는 ‘교사’라고 합니다(엡 4:11). 목사가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딤전 3:2, 딤후 2:24).
아모스 3장 1-8절을 통해 세 가지 일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시고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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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28일
In 금요 묵상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때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호 1:1b). 북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여로보암 1세)이고, 다른 한 명은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여로보암 2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13번째 왕 때 활동했고 그 때가 북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할 때였습니다(왕하 14:23-28).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호세아 10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a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이 말은 이스라엘이 부강한 것을 은유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해주신 분이 누구실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열왕기하 14장 26-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b절입니다.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제단’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제단을 말하고, ‘주상(柱像)’은 기둥 모양의 우상을 말합니다. 우리말성경에는 ‘돌기둥 우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부강해질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2절입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벌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하게 된 이유를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이 반은 하나님께 가 있었고, 반은 우상에게 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도 섬겼고 우상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하셨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출 20:3-6). 어떤 형체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 우상이 될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없을까요?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요일 2:15-16, 약 4:4). ‘두 마음’ 품는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사람도 두 마음 품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시 119:113). 야고보서 4장 8b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3절입니다. “‘우리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지만, 이제 임금이 있은들 무엇에다가 쓰랴?’ 하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새번역).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면 나라를 잃게 될 것이고, 한탄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왕이 죽고 나서 31년 뒤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 10장 1-3절이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수 2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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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21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61장 1a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나’는 누구일까요? 메시야(구세주)입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이 말씀을 찾아 읽으시고(눅 4:16-20)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 4:21b)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 글은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데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눅 4:18)이고,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낮은 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대체로 마음도 가난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1a절 다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b). 이 말씀도 메시야가 하실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무엇에 대한 애통일까요? 죄에 대해 애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눅 18:13). 두 사람 중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간 사람은 세리였습니다(눅 18:14a).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1-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롬 3:10, 23). 죄인은 죄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죄 값은 사망입니다(롬 5:12).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죄 사함 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롬 6:23, 5:19).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사랑입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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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14일
In 금요 묵상
디모데후서 2장 14-26절에는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14a). 그렇게 말한 이유는 말다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14b절). 말다툼을 하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고, 듣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에게 말다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안 들을 가능성이 크고, 잘못하다 보면 목사가 반발을 살 수도 있고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말다툼에 웬만하면 안 끼려고 합니다.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끝내기를 바라면서 기도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라”는 말씀도 합니다(25절). 그러므로 목사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할 때는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다른 성도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성도님이 계시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말다툼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말다툼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15b절). 어떻게 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15a절). 목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은 목사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합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면 엉터리로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엉터리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사람의 말로 가르칩니다. 인본주의 사상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좋은 일꾼이 아닙니다. 둘째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16a절). ‘망령되고 헛된 말’은 비성경적인 말, 이단적인 말입니다(16b-18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었는데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쳤습니다(18절).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안 믿고 영혼의 부활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안 믿으면 부활을 안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5:12). 그런데 그런 식으로 믿고 가르치면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18b절).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하면 안 됩니다. 논쟁할 필요도 없습니다(19b, 23a절).
셋째는 깨끗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20-21절). 큰 집에는 ‘금 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 ‘질그릇’도 있지만 주인이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도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많이 배웠다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한다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26). 많이 못 배웠어도, 말을 잘 못해도 깨끗하면 쓰십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시 119:11, 9). 둘째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와 함께 따르라고 했습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따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혼자하면 안 되고,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히 1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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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1월 07일
In 금요 묵상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는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남자 성도를 대할 때는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젊은 남자 성도를 대할 때는 친형제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연세가 많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는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하고, 젊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는 순결한 마음으로 친자매를 대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또 다른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친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하라’는 말은 친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편하게’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입니다. 가족들 간에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가정도 있지만 그런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 가족들 간에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도 있어야 하고, 성도들 간에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인간관계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좀 친하다고 해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좋은 관계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가 오래 계속되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3:5).
말을 할 때도 예의를 지켜서 해야 합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야’ ‘너’로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OOO 자매(님)/형제(님)/성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 자매님들 간에 ‘OOO 자매(님)’이라는 호칭대신 ‘OO야’, ‘OO 언니’라고 부르는 자매님들이 많아진 것을 봅니다. 그렇게 부르게 되면 ‘야’ ‘너’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품격이 떨어진 말도 쉽게 나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OOO 자매(님)/모매님/성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3절 이하에는 ‘과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과부’라는 말이 나쁜 말은 아니지만 듣기 좋은 말도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부득불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 안에 과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도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3절은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참 과부’는 연세가 많은 혼자되신 분을 말합니다. “참 과부를 존대하라”고 한 이유는 젊은 나이에 혼자된 분들은 재혼할 가능성이 높고, 재혼하면 더 이상 과부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세가 든 과부를 존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 과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75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디모데전서 5장 9절은 60세는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디모데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수명이 오늘날보다 짧았기 때문에 60세가 오늘날의 75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에는 60세가 노인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 60세는 중년이고 75세는 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 과부’로 존대 받으려면 살아온 삶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딤전 5:9-10). 존대 받는다는 말은 도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손자가 있다면 자녀/손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딤전 5:4), 자녀/손자가 없고 친척이 있다면 친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딤전 5:16).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16)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족이나 친척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돕는 우리가 됩시다.
혼자되신 분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딤전 5:5-6). 혼자되신 분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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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31일
In 금요 묵상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역하라”고 했습니다(딤전 1:3a).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게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딤전 1:3b-4a).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런 사람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3절)은 바울이 가르친 교훈과 ‘다른 교훈'을 말합니다. ‘다른 교훈’을 공동번역성경은 ‘그릇된 교리’로 번역했고, NIV 영어성경은 ‘틀린 교리(false doctrines)’로, NASB 영어성경은 ‘이상한 교리(strange doctrines)’로 번역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갈 1:6-7), ‘다른 복음’과 ‘다른 교훈’은 같은 말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다른 교훈(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이단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이단은 아니지만 성경을 살짝 비틀어서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유튜브에서 여러 명 보았는데, 성경을 잘 모르면 그들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튜브를 볼 때도 분별력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이유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딤전 1:4b). ‘하나님의 경륜’은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일’(NIV), ‘하나님의 계획’(공동번역)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다른 교훈’을 말하는 자들이 있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자들이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바른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교회는 늘 시끄러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6b-7)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잘못된 사람들이 붙든 것은 ‘율법’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 계속 말하는데(딤전 1:8-11) 그것을 봐도 그들이 붙든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롬 3:20).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갈 2:16, 3:24-25). 그런데 에베소의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른 교훈(교리)’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교훈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목사님, 유명한 신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검토)”해야 합니다(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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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24일
In 금요 묵상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대상인 ‘너’는 시온, 즉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사야 60장 1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래 전부터 여러 민족에게 짓밟혔고 지금도 분쟁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방인의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예루살렘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1a절)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1b절). ‘네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메시야를 말합니다. 이사야 9장이 2절에서 말하는 빛도 메시야를 말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이사야 60장 1절 다음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2-3). 이스라엘 사람들 “위에 임하”신 여호와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알아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날 때 이방 나라들은 빛 되신 예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우러러볼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60장 2-3절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60장 1-3절은 천년왕국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이사야 60장 전체가 천년왕국 때 있을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7년 대환난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면 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모입니다(4절). 모일 때는 빈손으로 모이지 않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모입니다(5절). 수많은 낙타와 양들도 오게 되는데, 양들 중 일부는 성전에서 드려질 제물로 사용됩니다(7절). 천년왕국 때 있을 성전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40장 이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년왕국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속죄의 일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천년왕국 때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이방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이는데, 이방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도 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을 드리기 위함입니다(9절).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것은 이사야 2장 2-3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1절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이 비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5:14a, 16). 그렇게 사는 우리가 됩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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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18일
In 금요 묵상
미국에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불쌍하게 생긴 유대인 남자의 얼굴모습 부조(浮彫)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습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애 1:12b).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의인화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한 말입니다. 자비와 긍휼을 구했지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은 고사하고 유다가 멸망한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애 1:21a). 특히 에돔이 그랬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시 137:7). 참으로 고약한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관계가 안 좋았다 해도 고통당하면 불쌍히 여겨주고 도와주는 것이 도리인데 에돔과 유다의 주변 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애 1:14). ‘예루살렘이 감당할 수 없는 자’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죄악’을 범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렘 25:2-9). 유다가 멸망한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벧후 3:9).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멸망하지 않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멸망하는 것입니다(요 16:9).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가 70년 뒤에 다시 회복됩니다. 그랬다가 몇 백 년 뒤에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합니다. 로마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계로 흩어져서 2천 년 가까이 고통을 당했는데, 그들의 고통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까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 1:12a)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 때문에 고통당했다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사 53:5).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창 12:3).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과 전쟁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창 2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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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11일
In 금요 묵상
‘위대한 삶’은 어떤 삶일까요?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삶입니다. 침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 같은 분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불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젊은 나이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위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정하셨고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요시야 왕도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1a절). 39살에 애굽과 전쟁을 하다가 전사했습니다(대하 35:23-24). 짧게 살았지만 그의 삶은 위대했습니다(2절, 왕하 23:25). 그의 아버지 아몬은 악한 왕이었고(왕하 21:20-23), 할아버지 므낫세도 악한 왕이었습니다(왕하 21:5-6). 그런데 요시야가 좋은 왕이 되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누군가가 어린 요시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주었기 때문입니다(잠 22:6). 누가 그렇게 해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하 34장을 보면 요시야는 왕위에 있은 지 8년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다고 했습니다(3a절).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16살 어린 나이에 그렇게 했습니다. 왕위에 있은 지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상을 제거했습니다(3b절). 20살도 사실은 어린 나이인데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했으니 요시야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26살이 되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성전을 수리했습니다(3-6절). 성전을 수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성전에 드려진 돈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맡기고 돈 계산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7절). 요시야 왕이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시야 왕은 통이 크고, 사람들을 잘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왕이 자신들을 믿어주니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시야의 이런 면은 우리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요시야처럼 사람을 믿어줄 줄 알아야 하고 격려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8절). 서기관 사반이 율법책을 요시야 왕에게 읽어주자 왕이 옷을 찢었습니다(10-11절). 범죄한 자기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재앙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13b절).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들을 보냈습니다(13a절). 훌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재앙을 내릴 것이지만(16-17절), 요시야 왕 때는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20절).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3명과 손자 1명이 차례로 통치하다가 유다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위대한 삶을 산 왕으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요시야 왕처럼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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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10월 04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59장에는 유다 백성의 죄와 구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와 구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절의 유다 사람들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3절). 나라 전체가 죄로 물들었습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다”(4a절)고 했습니다. 판사들과 사법부는 그 나라의 정의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판사들과 사법부가 부패했으니 그 나라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판사들과 사법부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유다 사람들은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한다”고 했습니다(4b절). 공동번역성경에는 “터무니없는 것을 믿고 사실무근한 소리를 지껄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짜 뉴스와 가짜 정보들이 생각납니다. 유튜브에는 좋은 정보와 바른 소식도 많이 올라오지만 거짓 정보와 가짜 뉴스는 또 얼마나 많이 올라옵니까. 4b절 말씀처럼 사실무근한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도 많고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로 물든 사회의 모습입니다.
유다 사람들의 죄 중에는 ‘악한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7a절).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만 죄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악한 생각도 죄로 보십니다. 노아 시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악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창 6:5). 악한 생각도 죄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12).
죄를 지은 유다 사람들은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7b-8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평강이 그들에게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평안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사 57:21, 48:22).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사람 스스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참 평안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4:27a).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의 죄를 지적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이 자신들과 멀다는 말도 했습니다(11절). 구원이 멀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12a절).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켰다”고 했습니다(13a절). 유다 백성이 죄를 짓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뿐 아니라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이 이 이유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롬 1:28). 죄에서 떠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4:6).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할 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을 구원해줄 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직접 구원해주시기로 합니다(15b-16a절). 16절에 ‘중재자’, 20절에 ‘구속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700년 뒤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다의 구원을 말하면서 동시에 구원자 예수님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이스라엘)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마 1:21, 롬 1: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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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19일
In 금요 묵상
열왕기하 9장 27-37절에는 유다 왕 아하시야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예후에 의해 죽임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악한 아합 왕과 그의 집안을 멸하기 위해 세운 사람입니다(왕하 9:1-3, 6-10).
아합은 19명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제일 악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이 그렇게 된 데는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이 컸습니다(왕상 16:30-33). 아합은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6대 왕 오므리입니다. 오므리는 왕위에 12년 있었습니다(왕상 16:23). 아합은 왕위에 22년 있었습니다(왕상 16:29). 아합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였는데 그는 2년 왕위에 있었습니다(왕상 22:51). 짧게 왕위에 있은 이유는 병에 걸려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왕하 1:2a). 그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합의 또 다른 아들 여호람입니다(왕하 1:17). 여호람은 왕위에 12년 있었습니다(왕하 3:1).
예후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움 받고 나서 제일 먼저 죽인 사람이 여호람 왕입니다(왕하 9:22-24). 여호람의 또 다른 이름은 요람입니다.
요람을 죽이고 난 뒤에 예후는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였습니다(27절). 아하시야는 유다의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왕 집안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열왕기하 8장 26절에 의하면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이고, 아달랴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입니다. ‘오므리의 손녀’라면 아합의 딸 아니면 조카라는 말인데, 열왕기하 8장 16-18절을 보면 아달랴는 아합의 딸입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가 아달랴이고, 아달랴의 아버지가 아합이면, 아합은 아하시야 왕의 외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니 아하시야는 유다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왕 집안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의 요람 왕과 가까이 지내다가 예후에 의해 요람과 같은 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역대하 22:7a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입었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하시야가 죽임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했기 때문입니다(왕하 8:27).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 다음으로 예후가 죽인 사람은 이세벨입니다(30-33절). 예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세벨은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펑안하냐?”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이 말한 ‘주인’은 이세벨의 아들 요람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리’는 이스라엘의 엘라 왕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다섯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왕상 16:9-10). 시므리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된 것에 빗대어 예후를 시므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결국 창밖으로 던져져 죽었고, 이세벨의 시신은 개들이 와서 먹었습니다(34-37절). 엘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왕상 21:23). 이세벨의 끝이 이렇게 된 이유는 이세벨이 행한 악행 때문입니다(왕상 21:25). 아합 왕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한 사람도 이세벨이었고, 죄 없는 나봇을 죽게 한 사람도 이세벨이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사람도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런 이세벨을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예후가 아하시야 왕과 이세벨을 죽인 내용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다 하는 것과,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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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12일
In 금요 묵상
열왕기하 6장 15-23절에는 아람(시리아)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읍을 에워싼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려고 한 이유는 아람 군대의 동향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는 엘리사 선지자를 잡아야 아람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5-23절 말씀을 읽어보면 엘리사 선지자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영의 눈을 뜨고 산 사람입니다. 도단 성읍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 선지자의 종은 두려워했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사 선지자는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5-17절). 아람 군대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지만 하나님의 군대를 보는 것은 영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영의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살아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시 121:1-2). 영의 눈을 뜨고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시 19:8), 기도하는 것입니다”(시 119:18).
둘째, 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열왕기하 6장 15-23절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세 번 기도했습니다(17a, 18a, 20a절). 세 번의 기도가 다 '눈'과 관련된 기도입니다. 세 번의 기도를 하나님은 다 응답해주셨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의 생활이었고 삶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복이요 특권입니다(요 16:23b-24, 마 7:7-8). 기도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약 5:16b).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셋째,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기 위해 접근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18절). 그들의 눈이 멀자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 성읍에는 당신들이 찾는 그 사람이 없소. 내가 당신들을 그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인도하겠소”라고 하고는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했습니다(19절).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사마리아 성 안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거짓말로 아람 군대를 속였지만 그것은 엘리사 선지자 자신도 살고, 아람 군인들도 살리기 위한 그의 지혜였습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엘리사 선지자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넷째, 그는 관용과 자비의 사람입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왕은 아람 군대를 쳐서 진멸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물었더니 “치지 말고 음식을 먹여서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21-22절).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그들을 배 불리 먹여서 돌려보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부터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23절). 이런 것이 관용과 자비의 위력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람 군인들을 죽였다면 아람 왕이 바로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사 선지자의 관용과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딛 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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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4년 9월 05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선지자 시절의 유다 사람들은 금식도 하고 안식일도 지켰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면이 강했습니다(사 1:11-13).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은 이렇게 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합니다. 당시 유다 사람들의 금식은 네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습니다(3a절).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는데 그것도 잘못되었습니다. 금식을 하는 두 가지 목적은 죄를 용서받기 위함과 기도응답을 받기 위함입니다. 속죄일의 규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레 16:29-31) 스스로 괴롭게 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한 것이 금식입니다. 속죄일은 1년에 한 번 있는 날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날입니다. 왕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살리기 죽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기 전에 금식기도를 부탁했습니다(에 4:15-16). 이와 같이 금식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와 기도응답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들은 금식하는 날 오락을 했습니다(3b절). ‘오락을 구했다’고 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자기의 즐거움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금식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그들은 금식하는 날 일꾼들에게 많은 일을 하게 했습니다(3c절). 속죄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하면 안 되고 종들도 하면 안 됩니다(레 16:29).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속죄일에 자기들은 금식을 하고 일꾼들에게는 일을 시켰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은 금식하면서 다투고 싸웠습니다(4a절). 주먹으로 치고받으면서 싸웠는데, 금식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금식할 일이 있으면 우리도 유다 사람들처럼 잘못된 금식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 몇 번 했다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금식을 할 때는 표 안 나게 해야 합니다(마 6:16-18).
9b-11절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금식하고, 바르게 살아가면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일까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9b절).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새번역성경은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국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면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주린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10a절). 셋째는 괴로운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10b절). ‘괴로운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한다’는 말은 괴로운 자의 심정을 헤아려준다는 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아무도 자기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고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13-14절에서는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일주일 내내 일만하면 몸도 망가지고 하나님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에는 몸과 마음이 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일예배를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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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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