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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서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복음서’, 다른 하나는 ‘작은 성경’(또는 ‘축소판 성경’)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로 불리는 이유는 이사야서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많기 때문이고, ‘작은 성경’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사야서의 구조와 내용이 성경 전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66권,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39권, 27권입니다. 이사야서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앞부분은 39장(1-39장), 뒷부분은 27장(40-66장)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율법’, 신약성경의 내용은 ‘은혜’인데, 이사야서의 앞부분 내용은 ‘심판’, 뒷부분 내용은 ‘회복’입니다. ‘율법과 은혜’ vs. ‘심판과 회복’. 대조되는 내용도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도 ‘예수님의 지상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서가 ‘작은 성경’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내용인 이사야 66장 7-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7-8절입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이 말씀의 의미는, 7년 대환난의 ‘진통’이 있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이 한 나라로 세워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회복되어 지금 이 땅에 있지만 이스라엘의 진짜 회복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때 일어납니다(슥 12:10, 13:1, 롬 11:26-27).
19절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이 말씀은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적그리스도로부터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복음 전도자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 전파할 것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도피한 자(들)’은 적그리스도로부터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복음 전파자들을 말합니다.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하나님은 14만 4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워서 복음을 하시는데(계 7장), 그들 중에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죽임당할 사람도 있고 살아남을 사람도 있습니다. 19절은 살아남을 사람들이 온 세계로 흩어져서 복음 전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마 24:14).
나머지 말씀들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심판(15-17, 24a절), 천년왕국(10-14, 18, 20-21, 23절), 영원한 불못(24b절), ‘새 하늘과 새 땅’(22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이 일어나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예언서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미래의 다른 두 사건을 함께 말하기도 하는데(24절) 이런 것을 ‘이중예언’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과 ‘작은 성경’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거의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기록된 대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일과 그 후에 있을 일입니다. 세상 되어 가는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이 땅에 있는 것만 봐도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머지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벧후 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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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토피아’(이상향, 지상낙원)를 꿈꾸어 왔습니다.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고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유토피아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토피아가 있습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65:20-23). 이 말씀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인데, 천년왕국이야 말로 사람들이 꿈꾸어 온 유토피아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해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받은 사람은 부활하게 되고, 부활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년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교회 시대가 영적인 천년왕국 시대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을 ‘무(無)천년설’이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은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의하면, 천년왕국 기간 동안 사탄은 결박당해 있습니다. 지금이 천년왕국 시대라면 사탄은 지금 결박당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지금 결박당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시대는 천년왕국 기간이 아닙니다. 또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의하면,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적그리스도(‘짐승’)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는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영적인 천년왕국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천년왕국입니다.
천년왕국은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고 난 뒤에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재림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 19장에 기록되어 있고,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지상으로 재림하십니다. 그렇게 믿는 것을 ‘전(前)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전천년설입니다.
천년왕국 기간이 끝나면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집니다(계 21:1). ‘새 하늘’에서 ‘거룩한 성(城)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계 21:2) 그 성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천국성입니다.
유토피아는 있습니다. 천국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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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6월 05일
In 금요 묵상
다윗은 위대한 시인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 중에서 제일 유명한 시는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시편 23편은 읽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며칠 전에 췌장암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분을 뵙고 왔습니다. 오래 전에 같은 교회에서 섬겼던 분입니다. 그분에게 어떤 말씀을 읽어드릴까 생각하다가, 시편 23편을 읽어드렸습니다.
시편 27편 1-4절도 다윗의 탁월한 시입니다. 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3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빛’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흑암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빛이 보인다면 그 빛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빛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둘째는 ‘나의 구원’입니다. 큰 위기를 당해 죽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고 구해준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셋째는 ‘내 생명의 능력’입니다. ‘내 생명의 능력’은 내 생명을 지탱해주시는 분, 내 생명을 보호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저와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일까요? 다윗의 고백처럼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이 되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2절 말씀입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악인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누가 다윗을 보호해주었을까요? 하나님입니다.
3절입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56편 1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4절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소원은 한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소를 말합니다. 그 당시 성소는 천막이었습니다. ‘성전’은 다윗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성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했을 때(삼하 7:1-2)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 집안의 왕위가 영원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삼하 7:11b-13, 16). 이 약속에 의해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이 놀라운 복을 받은 이유는 4절 말씀에 나타나 있는 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을 무한한 기쁨과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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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29일
In 금요 묵상
평안과 기쁨의 삶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입니다.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다면 건강도 돈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이 말하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위한 권면을 들어봅시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싱글벙글거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슬픈 일도 있기 때문에 항상 싱글벙글거릴 수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했는데, 감옥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상황을 바라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롬 8:28).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은 속으로만 관용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마지못해 관용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관용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가깝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말은 주님 만날 날이 가깝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재림하실 때 휴거되어 만나든지, 죽음을 통해 만나든지. 어떤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 날이 가까운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워했다 해도 죽기 전에는 용서하고 죽는 것이 맞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보셨습니까? 한두 번 또는 두세 번 용서해보셨습니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셨습니다. 용서하며 관용하며 삽시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어떤 말씀을 온라인으로 많이 검색했는지 조사한 결과가 나오는데, 거의 매년 제일 많이 검색한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염려할 일도 생기지만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기도할 때는 ‘감사함으로’ 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별일 없이 살게 해주신 것이 감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조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한대로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어떤 일로 마음에 평안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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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22일
In 금요 묵상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3-5).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고 했는데, ‘첫날’은 예수님을 믿은 첫날 아니면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첫날일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우면서 참여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정말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라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빌 1:3-4).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한 일에 대해서 바울은 ‘착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일, 제일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영혼이 멸망 길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게 된다면 그것처럼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한 평생 복음을 전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런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직접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복음 전하는 자들을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이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 즉 복음 전하는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사람이 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전도는 사람이 하지만 전도의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잘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도를 해도 안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도의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마 28:19-20).
빌립보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은혜’라고 표현한 이유는 복음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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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15일
In 금요 묵상
에스더서 3장과 4장에는 유다 사람들이 엄청난 위기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사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이 죽게 생긴 엄청난 위기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만이라는 사람이 왕의 허락을 받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에 3:13). 정말 무섭고 잔인한 조서입니다. 이 조서가 내려졌을 때 유다 사람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했습니다(에 4:1-3).
유다 사람들이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왕비 에스더가 듣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모르드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모르드개는 왕비 에스더의 사촌오빠이면서 에스더를 딸처럼 키운 사람입니다(에 2:7).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께 나아가 유다 민족을 위해 간구해주기를 원했습니다(에 4:6-8). 그런데 에스더의 말은 “왕께 함부로 나아갈 수 없고, 왕의 허락 없이 나아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1절). 그 말을 들은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3-14절). 이 말에 에스더가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에스더의 이 결단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됩니다. 에스더에게 있어서 ‘별의 순간’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을 때입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의 의미는 ‘별’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위기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나 ‘기도’라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 에스더서를 기록한 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인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유다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위기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모르드개가 생각해낸 것은 왕비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왕이 내린 조서가 취소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잠 21:1).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유다 사람들을 구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에 4:14a).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고전 10:13, 롬 8:28). 넷째,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죽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요 12:24-25).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됩시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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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08일
In 금요 묵상
‘새 하늘과 새 땅’은 성경에 네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21장 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신구약성경 66권 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이 제일 먼저 나온 책은 이사야서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직접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 1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사 1:1). 100년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사 64:10-11). 100년이 지난 뒤에 유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킨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무덤 사이에 앉았고,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고기를 먹었으며,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 국물을 마시기 위해 그릇에 담았습니다(사 65:4). 그런 죄를 지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이방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사 65:5a). 그런 유다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사 65:5b절, 새번역)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키셨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명맥은 이어지게 해주셨습니다(사 65:8-9).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시켜 주셨고, 메시야 예수님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지만 하나님은 1948년에 다시 일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명맥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는 멸망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막강한 나라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조짐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상당수가 유대인들이고, 세계 최강국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이 이사야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영원히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불에 타서 없어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벧후 3:11-13).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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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5월 01일
In 금요 묵상
시편 119편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충고자’ 역할을 해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제일 긴 장입니다. 22개의 연(문단)으로 되어 있고, 한 연은 여덟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전체가 176구절입니다. 각 연의 각 구절은 동일한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됩니다. 영어로 예를 들면, 첫 번째 연인 1-8절은 각 절이 A로 시작하고, 두 번째 연인 9-16절은 B로 시작하고, 마지막 연인 169-176절은 Z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를 ‘알파벳 시’라고 하는데 알파벳 시는 기억하기가 좋습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몇 구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구절에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편 119편을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을 무척 사랑한 분임은 틀림없습니다(시 119:72, 103, 127). 다윗도 하나님 말씀을 무척 사랑했는데(시 19:10), 다윗의 표현과 시편 119편의 표현이 비슷한 것을 보면 다윗이 시편 119편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119편의 세 번째 연(17-24절)에 있는 말씀 몇 구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8절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놀라운 것’은 놀라운 진리, 교훈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공부할 때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19절.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시 119:105).
20절.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내 마음’은 히브리어성경에 ‘내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20절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율례들을 늘 사모하다가 쇠약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시인은 잠도 안 자면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시 119:147-148). 그러다가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병이 날 정도였습니다(시 119:131). 하나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22절.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시인은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이런 고초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욥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비방과 멸시를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이 했던 것처럼 계속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3절.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고관들이 비방한 것을 보면 시인은 상당히 고위직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봐도 시편 119편을 기록한 분이 다윗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방당할 때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합시다.
24절.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즐거움’을 주고 ‘충고자’ 역할도 해주는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것은 보통 큰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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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24일
In 금요 묵상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술람미’는 성경 전체에서 아가서 6장 13절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술람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해가 가능한데, 하나는 ‘수넴’이라는 지명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또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여성명사로 ‘솔로몬의 여자’라는 뜻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수넴’은 예수님께서 자란 나사렛에서 남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입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사랑했을 때 그에게는 이미 140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아 6:8). 그 수는 나중에 천 명으로 늘어납니다(왕상 11:3).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솔로몬이 제일 사랑한 여자가 술람미 여자였습니다(아 9a).
아가서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보니 아가서에는 읽기에 조금 민망한 표현도 나옵니다(아 4:5, 7:7). 그런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교훈을 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결혼생활에 도움이 필요할 때 아가서를 읽으면 좋습니다. 아가서에는 좋은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1:15, 2:2, 3), 아가서에 나오는 좋은 표현만 잘 사용해도 부부나 연인관계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서를 깊이 읽다보면 예수님이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아가서의 클라이맥스는 아가서 3장입니다. 3장에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자가 결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3장은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1-4절). 결혼하기 전날 밤에 술람미 여자는 자기의 임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만 찾지를 못합니다. 한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습니다. 찾아서는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오는 동안 자기의 임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습니다(4절).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혼하기 전날 밤에 술람미 여자가 꿈을 꾼 내용입니다. 솔로몬 왕이 나를 버리고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술람미 여자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꿈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5절 말씀은 2장 7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8장 4절에도 나옵니다. 나왔던 말씀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5절 말씀은 후렴구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6절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6절 앞에 후렴구(5절)를 넣은 것입니다. 6-11절에는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오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가마를 타고 오는데, 용사 60명이 가마를 호위하고 있습니다(7-8절). 솔로몬 왕이 탄 가마는 금과 은과 레바논의 나무로 만든 가마입니다(9-10절). 솔로몬 왕의 머리에는 그의 어머니가 씌어준 ‘왕관’이 있습니다(11절).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귀한 물건들도 많이 가지고 오는데(6절), 이는 술람미 여자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입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데려가기 위해 오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모습을 생각나게 해줍니다(살전 4:16-17).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러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요 14:1-3, 계 22:12).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아름답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요일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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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17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 63장 15절부터 64장 마지막 절까지에는 하나님께 ‘자비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지만 기도의 내용은 유다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64:10-11).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가 멸망하기 100년 전에 사역을 했던 사람으로서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못 보았는데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감동(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벧후 1:21).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에게 임한 비극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려면 예수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63:17b).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한 것처럼 말하지만(63:17a) 사실은 유다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부하면 내버려두십니다(시 81:11-12, 롬 1:28).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과 한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전 11:9).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유다를 멸망시켰으니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그들을 손봐 달라고 간구합니다(64:1-2).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2-3). 고레스 왕의 말입니다. 고레스가 이 말을 하기 1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고레스가 할 일을 예언했습니다(사 45;1).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64:5). 자신들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알고 있었고 죄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64:6-7). 이것을 알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사람은 죽는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히 9:27).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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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4월 04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는 ‘므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나’는 금이나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입니다. ‘달란트’도 금이나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인데, 한 달란트는 60므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므나의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절).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당장에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왕은 정치적인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나라로 가실 것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곧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주신 비유가 므나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기 전에 열 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했습니다(13절). ‘귀인’은 예수님을, ‘열 명의 종’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안 계시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지나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온 귀인은 종들을 불러놓고 결산을 합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칭찬의 말과 함께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도 칭찬의 말과 함께 다섯 고을 권세를 주었습니다.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한 므나만 내어놓은 종에게는 책망을 하고(22-23절),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지고 있는 종에게 주었습니다(24-26절). 비유의 마지막 내용은, 귀인을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7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계 19:15-16).
므나의 비유에서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똑 같이 맡긴 ‘한 므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모든 제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 같이 맡긴 것이 무엇일까요? 은사나 재능은 아닙니다. 은사나 재능은 사람마다 받은 것이 다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에서 종들이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것이 은사나 재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 같이 맡긴 것은 ‘복음’입니다(살전 2:4a, 딤전 1:11, 6:20). 복음을 ‘한 므나’에 빗대어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므나는 그렇게 큰돈이 아닙니다. 이왕 비유로 말하는 거, 달란트처럼 큰돈에 빗대어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복음이나 전도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전도는 어떻게 보면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복음도 어떻게 보면 우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롬 1:16-17).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만큼 귀한 길이기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 12:3). 더 많은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준 것처럼 예수님도 더 많이 복음 전한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계 22:12, 살전 2:19).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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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3월 27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6장 14-31절에는 바리새인들과 관련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속물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은 좋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했을 때 비웃었습니다(14절).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너희는 위선자들이고, 하나님은 너희의 위선을 미워하신다’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15절).
그 다음 16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구약시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16절 말씀의 의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는 요한이고, 요한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될 것인데 복음이 전파되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시대를 우리는 신약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도 몰랐고, 구약시대가 가고 신약시대가 온 것도 몰랐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성경이 더 이상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17절은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5:17-18). 구약성경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은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요 5:39). 18절에서는 예수님이 갑자기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말 2:16a). 이혼할 때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했는데(신 24:1-2) 그 이유는 이혼 당한 여자를 보호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정욕을 위해 이혼을 밥 먹듯 했으니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19-31절).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14a, 19절). 어떤 사람들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믿는 기독교 계통의 이단들이 주로 비유라고 말하는데, 성경을 보면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막 9:48-49, 계 20:10).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중요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은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창 15:6). 부자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는 방법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 3:16-17).
그런데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구원받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 중의 하나가 돈입니다(눅 18:25). 그래서 예수님이 돈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구원받은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믿음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마 6:33, 시 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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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3월 21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3:23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공동번역성경은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구원’이고,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 많다 말씀하시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a)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과 구원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원받는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구원으로 가는 문과 길이 좁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찾는 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다니면 넓어지게 되어 있고, 안 다니거나 소수의 사람만 다니면 좁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으로 가는 길과 문이 좁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은 사실 쉽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사도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인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구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눅 13:24b).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방법으로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했던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마 7:21).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요 6:40).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 행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 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도 함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는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때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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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3월 14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11장 33-36절에서 예수님은 ‘등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말씀을 하셨고(33절), 그 다음 절에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34절). 눈이 ‘몸의 등불’인 이유는 눈이 어두우면 낮이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 없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빛’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속에 있는 빛’이 무엇일까요? 영혼을 비추는 빛, 영적인 빛을 말합니다. 이 빛은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빛이 밝으면 영안이 밝은 것이고, 이 빛이 어두우면 영안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은 이렇습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절). 여기서 ‘온 몸’은 육체와 영혼을 말합니다. ‘온 몸이 밝다’는 말은 육체와 영혼의 눈이 다 밝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눈도 밝아야 하지만 영혼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육체의 눈은 밝았지만 영혼의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부터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드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37-38절). 이상하게 생각한 이유는 위생적으로 불결해서가 아니라, 정결의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속이 정결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의식을 행했지만 그들의 속은 전혀 정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속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했지만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보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b).
이어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0-41절). 겉만 깨끗하게 하지 말고, 속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도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마 15:18-20).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속을 잘 관리하려면 속을 잘 볼 수 있어야 하고, 속을 잘 보려면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41절은 ‘구제를 하면 속이 깨끗해진다’는 말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41절의 ‘구제’는 ‘탐욕’의 반대 개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속에 ‘탐욕’이 가득했던 이유는 그들의 영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운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탐욕입니다. 삭개오(눅 19장)가 그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돈밖에 몰랐고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안이 열리고 ‘구제’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눅 19:8). 나는 영안이 밝은 사람인지 어두운 사람인지 알려면 재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빛’이 밝은지 어두운지 늘 살피면서 영안이 밝은 사람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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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3월 07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9장 28-36절에는 예수님께서 어느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 쯤 되어”(28절)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6-27) 하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영광스러운 그 모습을 너희 중 몇 사람은 “죽기 전에”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그 모습을 8일 쯤 뒤에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고 그 옷은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29절). ‘용모가 변했다’는 말은 얼굴 모습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태와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 9:3).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공중으로 들림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올 것인데 성도들이 입고 올 옷이 희고 빛나는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계 19:8, 14).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셨습니다(30절).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과 구약시대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마 22:40, 눅 16:16). 구약성경과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별세’ 즉 죽음이었습니다(31절). 왜 예수님은 모세, 엘리야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오시려면 먼저 죽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요 12:23-24).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살기 위해서는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2:25, 눅 9:24). 영어표현 중에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누릴 날을 고대하지만,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주님과 함께 고난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행 14:22b). 필요하면 죽음도 불사해야 합니다. 고난과 죽음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이 기꺼이 고난당하고 순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세 제자가 졸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보고 베드로는 얼떨결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33절). 8일 전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은 싫고 영광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복음과 함께 고난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영광은 천국에서 누리고, 이 땅에서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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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2월 27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7장 36-50절에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에 대해 의사 누가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37a절).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47절). 많은 죄를 사함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37-38절). 향유는 그 당시 굉장히 값비싼 물질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요 12:5).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는데(마 20:2)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5만원이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4,500만원에 해당됩니다. 힘들게 모은 값비싼 향유를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귀한 분이다 보니 감히 머리에 부어드리지 못하고 발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향유를 부어드리기 전에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집니다.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지자 여자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38절).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이 여자를 보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여자가 생각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다그치자 일어나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계속 쓰십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떠나가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 8:10-11). 사람들은 같은 죄인으로서 그 여자를 정죄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으로서 정죄할 수 있었지만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여자는 평생 예수님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여자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자는 아니겠지요? 어쩌면 같은 여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같은 여자인지 다른 여자인지 알 수 없지만 두 여자의 공통점은 두 여자가 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집의 주인(바리새인 시몬)은 여자가 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41-43절). 바리새인 시몬과 여자의 행동을 비교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44-46절).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도 몰랐고, 자신이 죄인인 것도 몰랐습니다(39절). 반면 여자는 자신이 죄인인 것도 알았고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47-50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늘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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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2월 20일
In 금요 묵상
누가복음 5장에는 레위라는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고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27-28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레위가 그렇게 한 것을 보면 레위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와 같은 사람입니다. ‘레위가 마태’라는 직접적인 말은 성경에 없지만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부르신 내용과 세리 마태를 부르신 내용(마 9:9)이 같은 것을 보면 동일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와 동일한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눅 5:8, 11). 알았다 해도 직장을 포기하고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따른 것을 보면 레위나 베드로는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아는 것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대단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는 매국노처럼 여겨지던 사람입니다. 죄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를 제자로 두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대단한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고, 세리 레위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에게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엡 2:8).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29절). 잔치를 연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 귀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정말 귀한 분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 중에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없습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30절).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세리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도 죄인이었습니다(마 23:25-28). 하나님의 눈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시 14:2-3).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습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이유는 지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요 16:9, 3:18).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방했고,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습니다(33절).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4-35절). ‘신랑’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상황에 맞게, 필요에 따라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위한 금식을 했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금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을 할 때는 표 안 나게 해야 합니다(마 6:16-18).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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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2월 13일
In 금요 묵상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로 불립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이사야서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기록되었지만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해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7:14, 9:6). 고난을 당하고 악인처럼 처형될 것과 부자의 묘실에 안장될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53장). 부활하실 것과(사 53:10-11)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63:1-6).
이사야 63장 1-6절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a절을 보면 ‘에돔에서’ 어떤 분이 ‘붉은 옷’을 입고 오시는데 이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붉은 옷을 입고 오는 분에 대해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1b절)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옷이 붉은 이유는 포도즙 틀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2-3a절), 그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대적하는 자들을 짓밟아 죽일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3b절). 요한계시록 14장 19-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직전에 적그리스도는 예수님과 전쟁하기 위해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불러 모으지만(계 16:16) 예수님은 그것을 그들을 심판하시는 기회로 삼으셔서 그들을 멸하십니다(계 19:11, 15-18).
1절의 ‘에돔’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상징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에돔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된 이유는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많은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시 137:7, 겔 35:5-6, 욜 3:19, 암 1:11-12). 4절의 ‘원수 갚는 날’은 예수님께서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원수 갚는 날’을 말하고, ‘구속할 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속할 해’를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과 구속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있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은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십니다(계 19:15-18).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해주십니다(슥 12:10, 13:1).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잘 안 믿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졌고 그 결과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으면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를 다시 유대인들에게 주십니다(롬 11:25-27).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조금씩 많아지는 것을 보면 그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구원받는 일은 7년 대환난 기간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4천 명의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고 구원받게 할 것입니다.
5-6절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인 것을 강조합니다(요 5:22-23).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사 59:16a, 20, 딤전 2:5, 행 4:12).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만나지 않으면 심판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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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30일
In 금요 묵상
여호수아 20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피의 보복자’를 피해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된 성읍입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3절).
도피성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1장, 민수기 35장, 신명기 19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3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을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마 10:29).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은 요단강 동쪽에 세 개, 요단강 서쪽에 세 개 있었습니다(민 35:9-15). 여섯 개의 성읍은 다 레위인들이 사는 성읍입니다(민 35:6). 신명기 19장 3절과 6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도망가는 중에 죽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아놓으라는 말씀을 합니다.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라못, 골란입니다(7-8절).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에 도착하면 성읍 문 어귀(입구)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한 일을 말해야 하고, 성읍의 장로들은 성읍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성읍의 한 곳에서 살게 해줘야 합니다(4-5절). 언제까지 살게 해줘야 하는가 하면,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살게 해줘야 합니다(6절).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말 실수로 죽였는지 아니면 고의로 죽였는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실수로 죽인 것이 확실하면 그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읍에서 살아야 합니다. 6절의 ‘또는’은 ‘그리고’로 바꾸어야 더 좋은 번역이 됩니다. 새번역성경이 6절을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그 살인자는 그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 나왔던 성읍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민수기 35장 24-28절과 32절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를 만든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해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감금해두기 위함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해도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과실치사죄’를 범한 것입니다. 과실치사죄에는 벌이 있습니다. 살인죄보다는 가볍지만 어느 정도의 벌은 받아야 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안에 있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수로 사람을 죽였어도 죽은 사람의 목숨 값은 지불되어야 했습니다(민 35:33).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즉 대제사장이 대신 목숨 값을 지불할 때까지 도피성에 있게 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목숨 값을 대신 지불한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히 2:17, 7:27). 사람을 죽인 사람이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고전 15:22, 롬 5:18). 예수님은 죄를 지은 모든 사람에게 도피성이 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마 11:28, 히 7:25, 행 4: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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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담임 목사님
2025년 1월 23일
In 금요 묵상
여호수아 16장과 17장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두 아들 이름인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요셉은 안 들어가고 요셉의 두 아들이 들어가는 이유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창 48:5-6). 여호수아 16장과 17장 내용 중에서 세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분배받은 내용입니다(17:3-4). 모세가 살았을 때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를 찾아가서 자기 아버지는 아들이 없으니 아들이 받아야 할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민 27:3-7). 그 약속을 근거로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했고, 여호수아는 주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서 만드셨지만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시지는 않습니다(갈 3:28). 남자와 여자를 구별은 하시는데, 구별하시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녀평등은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은 하되 차별은 하면 안 됩니다.
둘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내용입니다(16:10, 17:12-13).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처음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종으로 부릴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7:16, 20:17-18).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진멸했어야 했습니다. 힘이 없다면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해서라도 진멸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할 힘이 생겼을 때는 종으로 부릴 생각으로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삿 2:2-3).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살전 5:19-22).
셋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땅 분배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내용입니다(17:14).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분배받은 땅이 작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여호수아는 땅이 좁으면 삼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라고 했습니다(15절). 여호수아의 말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골짜기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쫓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16절). 여호수아는 “그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어도 너희가 능히 쫓아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18b절). 맞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에 능히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쫓아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갈렙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갈렙은 하나님을 보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철 병거를 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나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개척 정신을 가지고 삽시다(17:15b, 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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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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